[아하! 법]"스트레스도 업무상재해 해당"

  • 입력 2001년 4월 2일 18시 29분


▼사무직 근로자 소송 급증▼

일상화한 야근, 쏟아지는 일거리와 상사의 질책, 매일 찾아오는 술자리.

주당 근무시간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은 빡빡한 근로환경 속에서 한국의 직장인들은 괴롭다.

높은 노동강도에서 오는 심리적 부담과 스트레스는 ‘술 권하는 사회’에서 굳어가는 간 위로 누적된다. ‘피로여 가라’를 외치며 각종 영양제도 찾아보지만 과로에 대한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나 과로로 인한 질병과 이로 인한 사망률은 계속 늘고 있는 추세다. 또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달라는 소송도 늘고 있다. 특히 업무상 재해의 범위가 탄광에서의 진폐증이나 공장기계의 오(誤)작동으로 인한 사고 등 ‘블루 칼라’의 문제에서 사무직(화이트칼라) 근로자의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재해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6월 폐암으로 사망한 최성창(崔成昌) 전 대검찰청 공안3과장의 부인 김모씨는 16일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을 상대로 남편의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달라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냈다.

김씨는 “남편이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등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중요한 사건의 총괄책임자로 근무하면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며 “과중한 업무가 20년동안 누적돼 사망했는데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아 유족보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원은 이같은 소송에 대해 업무상 재해의 범위를 폭넓게 해석, 적극적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2월 지속적으로 술을 마시다 96년 간암에 걸려 사망한 인천 모 경찰서 형사계 강모 경장(사망 당시 49세)의 경우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김 경장이 마신 술은 20여년간 살인과 강도 등의 강력사건을 맡으면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술로 인한 간암과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것.

그러나 이런 종류의 질병이나 사망이 무조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재해가 회사 등 사용자의 관리책임하에 업무수행 과정에서 발생했으며(업무수행성), 그 업무가 재해를 유발할 만큼 과중했거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업무기인성)는 사실이 규명돼야 한다.

질병의 일차적인 발생원인이 업무와는 상관이 없더라도 그 수행과정에서 악화, 사망에 이르렀다면 역시 업무상 재해에 해당된다.

또 과로나 스트레스는 오랜 기간 쌓여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것인 만큼 근무현장을 떠난 이후의 사고도 업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인과관계가 입증되면 자살도 업무상 재해에 포함된다. 법원은 지난달 21일 전기줄에 목을 매 자살한 수도꼭지 연마공 구모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의 ‘업무외(外) 재해’ 결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에서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구씨가 98년 3월 10여년간 일해오던 분야에서 생소한 주조과로 일방적 전보조치된 뒤 긴장과 부담감 때문에 결국 1년여만에 자살에 이르렀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행정법원의 한 판사는 “개인의 건강상태나 근무환경 등에 따라 판결내용이 달라지기도 한다”며 “업무특성상 직접적, 의학적인 재해 원인을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산재보험과 손해배상▼

지난 89년 회사원 배모씨(당시 48세)는 회사 기숙사에서 동료들이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상태가 됐다.

가족들은 “회사가 부서의 인원 충원을 하지 않아 과중한 업무를 하도록 방치했고 직원들의 건강진단도 제때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회사측은 “카드놀이를 구경하다가 쓰러졌는데 무슨 업무상 재해냐”며 산재보험조차 받을 수 없도록 조치해 버렸다.

가족은 92년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4년동안 고심하던 서울지법은 96년 11월 가족의 주장을 받아들여 “배씨가 쓰러진 데에는 회사측도 40%의 책임이 있다”며 배씨와 가족에게 1억6000만원을 주라고 판결했다.

회사측이 항소를 포기해 판결은 확정됐다. 비록 사고가 난지 7년뒤였지만 배씨측은 산재보상을 받았을 경우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현행법에 규정된 산업재해보상제도는 크게 세 가지.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과 근로기준법에 따른 재해보상제도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그것이다.

재해보상제도는 회사의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무과실 책임주의) ‘업무상 재해’를 당한 근로자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식.

산재보험제도는 회사가 보험에 가입하고 보험기관인 국가가 보상을 하는 사회보험형식이고 근로기준법에 따른 제도는 회사가 직접 근로자에게 보상을 한다는 점이 다르다.

재해보상제도는 평균임금에 따라 보상액을 산정하지만 법원은 정신적 손해배상에 해당하는 위자료 등도 추가 인정하기 때문에 회사의 책임이 명백한 경우는 손해배상청구소송도 함께 내는 것이 유리한 경우가 많다.

회사의 불법행위를 입증할 책임은 근로자에게 있다. 또 우리 법원은 산재에 있어서 회사의 책임을 인정하는데 다소 인색한 편이다. 그러나 일단 회사의 불법행위가 인정되면 근로자는 산재보험을 통해 받은 금액과 손해배상액과의 차액을 더 받을 수 있다.

차병직(車炳直)변호사는 “일본에서는 이미 97년 과로로 인한 우울증으로 자살한 회사원에게까지 회사측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는 등 회사측 책임을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산업재해 배상 및 보상제도 비교
-민법상 손해배상재해보상
근로기준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책임요건근로자가 회사의 책임(고의 또는 과실) 입증해야회사의 책임 없어도 업무상 재해면 보상가능회사의 책임 없어도 업무상 재해면 보상가능
지급절차법원의 확정판결로 배상회사가 직접 일시불로 보상 (직접보상)회사는 보험에 가입,국가가 보상 (간접,사회보상)
지급액수실손해액 산정평균임금 따른 정률보상평균임금 따른 정률보상

▼로섹션을 마치며…▼

동아일보 법조팀이 지난해 4월6일자부터 매주 한면씩 제작해 온 ‘로섹션―아하 법’이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끝에 4월3일자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창사 81주년 새봄을 맞아 더욱 새롭고 유익하고 알찬 지면을 독자 여러분께 선보이기 위한 지면개편에 따른 것입니다.

정보화 시대와 법, 독자들에게 사건이 아닌 정보를 주는 법, 법조문이 아닌 법의 정신에 천착하는 심층 법조 기사를 목표로 시작된 로섹션은 1년 동안 47회에 걸쳐 제작됐습니다.

그동안 ‘벤처도 법을 알아야 뜬다’(2000년 4월6일)로 대표되는 정보화 기사에서부터 ‘인권운동 사랑방 대표 서준식씨의 삶’(2000년 12월12일자)이라는 묵직한 인생이야기까지, ‘피고인 자기고백서를 통해 범인이 아닌 인간을 보려한 판사들의 이야기’(2000년 6월22일자)등 앞서가는 법조인들의 이야기에서 ‘이혼한 부부의 냉동 수정란은 누구 것?’(2000년9월15일)등 국제 법률 화제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초심’을 지켜 왔다고 자부합니다.

1년 동안 한회도 거르지 않고 ‘법과 영화사이’를 연재해 로섹션을 빛내 준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와 참신한 아이디어와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로섹션 제작을 도와준 법조인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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