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아빠는 행복 배달부?<행복한 가족 계획>

  • 입력 2001년 3월 22일 18시 05분


일본의 가족 이야기는 늘 뻔하다. 권위를 잃어버린 가장, 사회에 짓눌린 40대. 더 이상 설명하기도 구차할 만큼 일본 영화 속 '가장'은 어딘가 하나쯤 나사가 풀려있는 모습이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많다. 회사에선 끽소리 한 번 못하다가 집에만 돌아오면 권위를 세우는 아버지들.

<행복한 가족 계획>엔 이 두 가지 캐릭터의 아버지가 모두 등장한다. 능력 없는 사회의 낙오자 가와지리(미우라 토모카즈), 밖에선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해도 집에선 극진히 대접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히로세(카타오카 츠루타로). '무능한 남자'라는 점에서 비슷한 그들은 자신의 모자람을 극복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식품회사 영업사원이었던 가와지리. 그는 회사에서 쫓겨난 후 가족과 함께 장인 댁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그는 원래 잘 하는 것이 없었고 의욕도 별로 없었기에, 장인(이카리야 쵸스케)이 운영하던 과자 가게에서조차 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손만 대면 과자를 터트리는 그에게 장인은 "자네 손은 완전히 가위손이구먼"이라며 혀를 끌끌 차고, 아들(사사키 가즈노리)은 "나도 아빠를 닮아 운동을 잘 하지 못한다"고 투정한다. 아내(와타나베 에리코)는 아이들을 혼낼 때마다 "너도 네 아버지처럼 되고 싶냐"는 말을 무심결에 뱉어낸다.

장인, 장모의 사이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아버지는 다 쓰러져 가는 과자 가게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 "여자에게 짓눌리면 사내가 아니다"고 생각하는 그는 속마음과 달리 여자들을 사사건건 무시한다.

대기발령자 명단에 오른 가와지리의 친구 히로세 역시 장인과 비슷한 캐릭터다. 그는 음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피아노가 우리 집에 무슨 필요가 있냐"며 내다 버리고, 아들에겐 따뜻한 관심보다 윽박 지르기가 먼저다.

<행복한 가족 계획>은 이런 '위기의 가정'이 수습되는 방법을 또다시 가장의 몫으로 돌려버린다. 아버지만 잘하면 온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가 곳곳에 담겨져 있다. 1주일의 기한을 준 뒤 아버지가 임무를 무사히 통과하면 300만 엔 상당의 보너스를 선물하는 일본의 인기 TV 프로그램 '행복한 가족 계획'. 이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한 '행복한 가족 계획'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위기의 가정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우수 프로그램으로 둔갑한다.

피아노를 한 번도 쳐 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1주일만에 결국 '즐거운 우리집'을 멋지게 연주해낸다는 이야기. 가족들은 아빠 덕분에 뉴욕 여행을 가게 되고 잃어버린 행복도 찾지만 아빠는 가족에게 행복을 주느라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가장의 무거운 어깨에 힘을 빼주지 않는 이 '만능 아빠 만들기' 프로젝트는 일본의 가족들을 앞으로도 더 많이 힘들게 하지 않을까.

아베 츠토무 감독은 "'행복한 가족 계획'이라는 TV 프로그램이 현대 사회의 축소판처럼 느껴져 이 프로그램의 뒷이야기를 상상하게 됐다"고 했는데, 그 이면의 상상에만 그친 점이 아쉽다.

모범 가장 운운하기 전에 가족의 행복까지 책임져야 하는 아빠의 짐부터 벗겨주는 게 더 시급한 일이 아닐지.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건 영화 속에서조차 어렵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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