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정훈/지시해야만 압력인가

  • 입력 2001년 3월 5일 18시 50분


기업 신용평가 과정에 정부가 개입해 평가 결과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동아일보 보도(1일자 8면)에 대해 금융감독원이 5일 반박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신용평가기관 직원들을 불렀지만 특정 기업의 신용평가등급을 상향조정하라고 압력을 가한 사실은 없다”는 게 요지.

기자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 평가사 실무자 A씨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현대전자 신용평가를 맡고 있는 그는 한국신용평가사(社)가 현대전자 회사채를 투기등급으로 낮춰 공시한 1월 22일 오후 4시경 금감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1월 26일 금감원에서 3개 신용평가사의 현대전자 담당자 모임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것. 그는 “신용평가사에 10년 이상 근무했지만 금감원으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신용평가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정보 등의 실무자와 평가팀장 등 8명은 금감원 채권시장팀장이 주재한 모임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금감원측이 “현대전자의 자금 사정이 좋아지고 있는데 사전 협의 없이 현대전자 등급이 떨어져 당황했다”며 “(평가사)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지 말고 시장 전체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참석자 B씨는 “신용평가사의 밥줄을 쥐고 있는 금감원이 이례적인 모임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압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모임이 끝난 뒤 한 신용평가사는 당초 세웠던 현대전자에 대한 등급 하향조정 계획을 슬그머니 취소했다.

한 금융 전문가는 “금감원이 ‘다시는 신용평가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해도 모자랄 판에 반박 자료를 낸 것은 정책의 폭력성을 자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취재 도중 모임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익명을 요구했다. 괘씸죄에 걸리면 큰일난다는 게 이유였다. 폭력배에 두들겨 맞고도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하는 힘없는 시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박정훈<금융부>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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