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도덕파탄 구경만 할텐가

  • 입력 2001년 2월 27일 18시 34분


이 땅을 등지는 사람이 갑자기 많아지고 있다. 희망이 없기 때문이란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희망 없는 사회에서는 살기 싫다는 것이 이민 행렬이 늘어나게 된 주된 이유라면, 정말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됐는가. 왜 우리 사회에서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가. 윤리와 도덕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는 민족이었다. 비록 가난하고 배는 고프더라도 체면 하나만은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 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후안무치(厚顔無恥), 도대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올바른 기준 세울 어른이 없어▼

정치가 가장 큰 원인임은 물론이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치졸하고 뻔뻔스러움의 연속이다. 석고대죄(席藁待罪)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있다. 이런 낯부끄러운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안방으로 생중계되다 보니, 나라 전체가 도덕 불감증에다 천박한 상업주의의 난장판이 되고 있다. 그러니 이런 나라에서 누가 살 마음이 나겠는가. 누가 이런 땅에서 자식을 키우고 싶은 생각이 생기겠는가.

우리 사회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와 같은 도덕 파탄을 염려하고 치유할 권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안에서만 어른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도 더 이상 시시비비를 가리며 올바른 기준을 세울 어른이 없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윤리가 땅에 떨어지면서 염치가 없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온통 편가르기 싸움뿐이다. 사색당파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싫어하는 국민은 각기 지역적으로, 또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단히 동질적이다. 제대로 되는 사회라면 이런 정치적 성향들이 서로 어긋나면서 교차돼야 한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를 좋아하는 사람도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영남지역에 사는 사람도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첨예하게 대립된 관점과 이익들이 서로 상쇄하며 조화와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갈등들이 서로 중첩되면서 증오의 골을 깊게 만들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개방사회가 맞닥뜨릴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내 편, 네 편으로 쫙 갈려 대립을 거듭하다 보면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만다. 양극화의 끝은 정면 충돌뿐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이렇게 달려가고 있다. 도대체 ‘국민의 정부’라는 구호가 무색할 지경이다.

용기 있는 올곧은 목소리가 지금처럼 절실하게 아쉬울 때가 또 있었던가. 우선은 여당과 야당 안에서 제 살을 도려내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많이 나와야 한다. 상대방이 하는 비판은 나를 ‘실패하게’ 만들 음모로밖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정치판에서는 이것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개혁파다, 소장파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꽤 있지만, 이들이 세상을 바로잡는 역할을 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백골난망(白骨難忘)이다. 권력의 나팔수 역할이라도 안해 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결국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지대의 사람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 여야 정치권과 무관하고, 지역감정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우며, 남북관계의 진전을 열망하면서도 북한의 비합리적 행태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사람과 집단과 조직이 나서야 한다. 이들이 나라의 기강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중간지대' 사람들이 나서야▼

어떤 정치체제를 보더라도 이 집단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선거 때를 생각해 보라. ‘백중(伯仲)’이라고 판단되는 지역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가. 조금만 잘하면 내 편이 될 수 있겠다고 하던 것이 상대방으로 넘어갈 경우, 그 허탈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여야 정치인들도 이 집단의 동향에 대해서만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권력을 잡자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나서서 한마디하면 그렇게 무게가 실릴 수 없다.

목소리를 내야 할 사람은 내야 한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침묵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방관은 더구나 말이 안된다. 하루가 급한 상황이다.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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