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 타워]은행들의 ‘반란’…제재수단 없어 고심

  • 입력 2001년 1월 28일 19시 18분


은행의 ‘반란’이 시작됐는가.

관치 금융에 오랫동안 속박돼온 은행들이 서서히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정부와 은행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1·3 부실기업 판정 때 회생 가능으로 분류됐던 235개 기업이 추가적으로 부실해질 경우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고 이들 기업의 여신을 회수한 은행에 대해 조사를 벌이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은행들은 이 같은 정부의 말을 ‘엄포성’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 정부는 이 같은 분위기에 당황하면서도 마땅한 압박 제재 수단이 없어 고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일은행 반란의 여파?〓윌프레드 호리에 행장이 취임하면서 정부의 금융시장 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제일은행의 독자 노선이 최근 국내 시중 은행들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제일은행은 지난해 12월26일 정부가 내놓은 산업은행 회사채 신속 인수 제도에 대해 협조를 거부했고 올해부터 발효된 워크아웃기업 협약에도 ‘제일은행에 유리할 경우에만 참가하겠다’는 조건을 달고 가입하는 등 독자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제일은행은 특히 정부의 공공연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은행의 수익성을 저해하는 정부의 정책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방침을 단호히 고수하고 있다.

하나은행도 현대건설이 발행한 기업어음(CP)과 관련해 금융감독원과 마찰을 빚고 있다. 이 CP는 새마을금고연합회가 지난해 1월20일 하나은행의 특정금전신탁에 가입하면서 현대건설 CP에 투자해 달라고 약정을 맺은 것. 하나은행은 최근 만기가 되자 새마을금고연합회측에 현금 대신 CP 현물을 내줬고 새마을금고측이 현대건설에 CP 지급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현대건설은 이 어음이 채권은행단이 만기를 연장해 주기로 합의한 ‘협의채권’이라며 지급을 거부했고 금감원도 하나은행에 경위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한 상태다. 그러나하나은행은 “이 어음은 특정금전신탁에 들어 있어 은행 재산이 아니라 고객 재산”이라며 “이를 은행이 현금으로 대지급할 경우 특정금전신탁의 체계가 무너진다”며 반발하고 있다.

또 조흥 주택 농협 등 채권은행들은 지난해 11·3 부실기업 퇴출 조치 때 회생 가능 판정을 받은 잠재 부실기업으로부터 4000억∼5000억원 규모의 여신을 회수했다. 금감원의 샘플조사 결과 조흥은행이 2000여억원, 주택은행과 농협은 각각 수백억원 규모의 여신을 회수했다는 것. 금감원은 이를 ‘약속 위반’으로 보고 전면 조사를 벌이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조사의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밖에 금감원은 지난해 말 신한 한미은행 등이 현대전자 수출환어음 한도 연장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언론에 흘리고 비판을 유도했지만 해당 은행은 ‘사실과 다르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상태다.

▽누가 은행에 돌을 던지랴?〓채권은행들은 기업에 대한 대출은 은행의 자체적인 기준과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것으로 전적으로 은행의 소관 사항이라는 주장. 11·3 기업 퇴출 때 회생 판정을 받은 235개 기업에 대한 지원 역시 ‘상황이 변화되면 판단도 바뀌는 것’이라는 견해다. 특히 정부가 최근 강조하는 ‘상시 퇴출 시스템’이라는 것도 경영 악화가 드러나면 그때그때 퇴출시키자는 것 아니냐는 것. 한 은행 관계자는 “11·3 기준이 무슨 바이블(성경·불변의 기준)이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11·3 조치 당시 회생 가능 판정 기업으로 분류됐더라도 차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과 책임은 채권은행에 있다”며 “정부로서는 가까스로 좋아지고 있는 자금시장에 찬물을 끼얹지 않기 위해 은행들을 독려하고는 있지만 대출을 강제하거나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 탓인지 정부는 최근 외면적으로 해당 은행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독거리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비로소 은행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정부가 엄포성 발언으로 ‘은행 길들이기’를 나서기보다는 이 같은 변화를 받아들여 시장 원리가 작동하는 공간이 확대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훈기자>dreamlan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