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록의 독서일기]"소나무는 우리 문화의 어머니"

  • 입력 2000년 12월 18일 18시 13분


세밑이 되니 더욱 보고싶은 형.

요 며칠새 아주 좋은 책 한 권을 읽었어. 장시 '순례자'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바지런한 작가 정동주의 '소나무'(거름 2000년11월 펴냄.199쪽 9800원)야. '한국의 마음이야기' 시리즈 첫 권으로 나온 책이지.

형은 '소나무'하면 맨먼저 무엇이 생각나? 시골 뒷동산의 솔바람소리, 아니면 어릴적 만들었던 솔피리, 징그런 송충이, 혹은 강냉이죽을 타먹으려고 솔방울 한부대씩 학교에 가지고 갔던 일.

누구는 애국가 2절 '남산위의 저 소나무…'가 생각나겠지. 아버지는 송지를 뜯어먹던 일제 때가 생각날테고. 멀리 성삼문은 '독야청청'을 떠올릴 거야.

나는 우리 고향에는 있지도 않던 동구밖 솔숲이 생각나. 동구 밖 솔숲은 우리 마음 속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님 웨일즈가 지은 '아리랑'의 서울 근처 아리랑 고개에 있었다는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떠올라. 조선조 수백년 동안 사형대로 사용됐다던 그 나무말이야.

항일 혁명투사 김산의 얘기에 따르면 어떤 젊은이가 옥중에서 만든 노래를 아리랑 고개에 올라 소나무 주위를 맴돌며 천천히 불렀대지. 그 노래가 퍼져 민중이 애창하게 되었대.

그 노래는 틀림없이 '아리랑'이었을거야. 아리랑의 어원이나 출처를 잘 모르듯이 소나무도 그렇게 우리 민족과 애환을 같이 해왔을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우리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 해온 소나무를 진작 마음 속에서 지워버렸어. 이 책을 읽으니 청맹과니가 따로 없더라구. 소나무가 바로 우리 문화의 어머니였어.

경주나 그 어디에 듬성듬성 있는 솔숲을 보면서 왜 친근한 느낌이 들고 그 속에 천년의 바람이 일렁일 것같은 느낌을 받았는지를 확실히 알았어. 그건 바로 소나무가 '조상 그 자체' 아니 '우리들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어. 역시 우리에게는 같은 피가 끈끈히 흐르고 있었던 거야.

소나무는 애초엔 신들이 키운 나무였대. 단군신화의 신단수.

이 책에는 소나무의 모든 것이 시시콜콜 다 담겨있어. 역사, 유래, 분포, 죽어서도 인간에게 베푸는 무한한 시혜, 절개의 표상인 이미지, 문학에서 꽃핀 세계, 추사의 '세한도'로 대표되는 미학, 민중의 삶속에서 함께 하는 덕스러움, 수난의 역사, 인간의 출생과 죽음을 같이하는 소나무의 일생 등. 사진작가 윤병삼씨의 멋드러진 40여컷의 컬러 사진들도 한번 눈여겨봐.

책을 다 읽고나면 눈도 마음도 한껏 부자가 된 것 같아. 어디서 이렇게 귀한 글과 멋진 사진들을 볼 수 있겠어. 아마 우리 심성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소나무 문화를 운치있는 사진과 정갈한 글로 풀어낸 최초의 '소나무 문화사'일 거야.

소나무를 생활 속에서 잊고 산다는 것은 커다란 비극인 거야. 그래서 소득이 1만달러가 된다한들 어찌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어.

시집 '농투산이의 노래'로 등단한 후 대하소설에 더욱 열을 쏟고 있는 작가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꼈어. 서사시 '논개'를 비롯해 '백정' '단야' '민적' 등을 펴냈고 얼마 전엔 '콰이강의 다리'를 출간해 화제가 됐었지. 한민족 수난의 역사에 기꺼이 펜으로 동참, 아픔을 같이 하고 있는 작가야.

'한국의 마음 이야기' 시리즈로 2편 '느티나무', 3편 '막사발'도 곧 나올거래. 어때, 기대되지 않아. 꼭 사서 읽었으면 좋겠어. 우리들 귓속에는 그 옛날 사랑방에 군불 지필때 톡톡 튀던 청솔가지의 '비명'이 여전히 들리고 있으니까 말야.

형, 다음에 만나면 소주 한잔 하고 양희은이 부른 '상록수'나 안치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목이 메도록 부르자고. '선구자' 노래는 우리 아버지 세대에 맡기고.

그러고 보니 깊은 뜻도 모르고 지은 내 아들 이름 '한솔'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더라고.

최영록<동아닷컴 기자>yr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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