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 사람들]'두산 베어스' 골수팬 이진하-신동일씨

  • 입력 2000년 12월 18일 17시 32분


'조계현 집' 습격사건의 주인공들
'조계현 집' 습격사건의 주인공들
8일 새벽1시 두산의 골수 팬인 이진하씨(28·자영업·ID 날자쌈닭)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조계현 선수의 부인이었다.

"두산과의 FA협상이 결렬된후 남편이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읽어보면서 너무 괴로워하고 있어요. 잠을 못 이루네요"

이진하씨는 전화를 끊고 즉시 두산팬들에게 '번개'를 날렸다.번개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사발통문을 돌리는 것.

"계현이 형님이 괴로워 하신대요. 우리 지금 형님 댁으로 모입시다."

이렇게 해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조계현집 습격사건'이 일어났다.

새벽1시 '번개'로 1시간30만에 모인 인원은 줄잡아 50명.번개를 번개불에 콩복아 먹을 속도였다.

이들은 소주를 마시며 조계현 선수집의 거실을 '점령'한채 날밤을 깠다. 안주는 조계현 선수가 직접 끓여온 김치찌게.당연히 구단도 안주꺼리가 됐다.

이날 조계현 선수는 "20년 넘게 야구를 해오지만 이런 팬들은 처음" 이라며 '무조건적인 두산잔류'를 선언해 버렸다.

야구팬들 중에서 가장 '골수팬'이 많기로 소문난 두산 베이스.

이들 중에서도 '골수중의 골수'를 자처하는 이진하씨(29·ID 날자쌈닭)와 신동일씨(28·자영업)를 14일 오후 만났다.

"강혁선수 트레이드 소식 아시죠? 두산 구단에 대해 실망이 큽니다. 어제 오후부터 채팅을 하며 밤을 샜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단관 식구'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단관은 '단체관람'의 줄임말. "○일 ○시에 두산 베어스 경기 단체관람 있습니다. 몇번 게이트 앞으로 모여주세요" 라고 누군가 '번개'를 쳤을때, 그 장소에 나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단관'식구가 된다. 이들은 팬클럽 회원이 아니다. 모일때마다 사람이 달라지는, 어찌보면 '익명'의 단체일수 있다.

그러나 일단 한번 모이면 '두산 베이스'라는 끈 하나로, 친형제 이상의 친밀감을 형성한다.

이들은 정말 열렬히 응원을 한다. 심지어 베이스가 아마야구로 치자면 콜드게임패가 날 정도로 지고 있어도 한 선수 한 선수의 이름을 연호하며 난리를 친다.

해태시절 조계현은 이들을 보고 "저 놈들 공산당 아니야" 라고 말했을 정도. "승패가 뻔히 갈라져서 두산(당시 OB)이 질게 뻔한데도 정신없이 응원하는게 이상했지요." 조계현 선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단체관람이 끝나면 이들은 1차 고깃집, 2차 맥주집을 가면서 야구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뒷풀이 자리에서도 꺾을수 없는 원칙이 있다. 소주는 '그린' 맥주는 'OB라거'를 고집하는 것. 타협은 없다. '그린' 이 없으면 주인에게 사다 줄것을 요구하고, 그것도 안되면 미련없이 자리를 뜬다.

술자리니 만큼 주정을 하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 서로 초면인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술취한 사람을 감싸준다. 왜? 이유는 단하나 "두산 베어스 팬이니까~."

두 사람은 두산과 현대의 한국시리즈때 생업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잠실과 수원구장에 나갔다. 야구장에서 목이 터져라 두산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하며 응원을 했다.

"물론 두산이 이기면 날아갈듯 좋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이기기 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야구팬은 이기기만을 바라는게 아니니까요.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이들의 '응원철학'은 명료했다. 승패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보는 것. 그래서인지 '타이틀 만들어주기' 추태나 '무조건 이기기 위한 야구'를 보는건 죽어도 싫다고 한다.

"4번타자가 3연타석 희생번트를 대는 팀이 있는게 우리 프로야구 입니다. 이건 좀 너무한거 아닙니까?"

"정규시즌 막판들어 순위가 결정나면 2군선수들 마구 내보내는 것도 팬들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두 사람 정도면 '야구박사'다. 하루에 절반이상을 '야구'이야기로 보내니 박사가 안되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일게다.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의 웬만한 소식도 쭉 꿰고 있다.

"한국프로야구 뭐가 제일 문제인것 같아요" 라고 물으니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듯이 말한다. "구단주들의 밀실담합이 없어져야 합니다. 선수협 문제만 봐도 그래요. 선수들이 권익을 찾겠다는데 왜 구단에서 훼방을 놓는지 이해할수 없어요. 선수들은 구단에 소속된 '물건'이 아니라 팬들과 함께 호흡하는 '인격체'입니다."

인터뷰내내 기자가 꺼낸 말은 몇마디 안됐다. 그야말로 청산유수. "언제까지 말할 수 있어요?" 하니까 "야구 이야기라면 밤을 샐 수도 있다"고 말하며 웃는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는 자리. 이진하씨는 "얼마있다 계현이 형님하고 '번개'한번 할건데 꼭 나오세요" 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날 당장 두산 베이스팬이 될 거란다.

최용석/ 동아닷컴 기자 duck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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