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정하/넉넉해야 베푸는 건 아니다

  • 입력 2000년 12월 17일 18시 49분


춥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는데도 그 추위가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면 그건 바로 마음이 추운 탓이다. 도처에 난무하는 위기감. 정치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걸친 위기의식 때문에 이 겨울이 더 춥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먼저 우리들 가슴에 가득 차 있어야 할 사랑이 부족해서라고 결론지었다.

불행하게도 요즘 우리는 사람보다 물건에 더 마음을 점령당해 있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다 갖춰 놓으려고 하지만 사람은 선뜻 자기 가슴속으로 들여놓으려 하지 않는다. 거리를 지나치면서 진열돼 있는 온갖 물건에는 다 관심을 보이지만 막상 사람들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는 세태. 세상이 더 각박해진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마음의 벽을 높이 쌓아두고 있었던 탓은 아닐까. 그랬기에 아마도 세상엔 불신과 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을 것이다.

▼물질에만 매달려 사랑 부족▼

이 계절이 더욱 춥고 쓸쓸한 것은 그것 때문이다. 망종스러운 정치인들의 행태나 어수선한 경제보다도 우리 가슴속에 들어 있어야 할 그 무엇, 진정 우리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줄 사람다운 사람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생각해 보라. 수레바퀴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을 핑계로 내 이웃과 친구를, 심지어는 내 가족조차 얼마나 등한시해 왔는가를. 내 주변의 것들을 진정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가를. 덕분에 지폐는 쌓이고 소지품은 늘어났을지 모르지만 그것들로 우리의 텅 빈 가슴을 모두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추운 것이다.

조그마한 관심과 사랑으로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스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훈훈한 미덕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지탱돼 왔고, 또 지탱돼 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마음의 문을 닫아두기 시작했다. 내 눈에 다래끼가 난 것은 아파도 남의 눈에 종기가 난 것은 상관없다는 식이다. 함께 길을 걷는 동반자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내가 짓밟고 일어서야 할 ‘남’만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동료도 없고, 친구도 없고, 우리 마음이 추울 수밖에.

브라질 작가 바스콘 셀로스의 작품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는 ‘제제’라는 주인공 소년이 나온다. 학교에 도시락 한 번 싸갈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형편의 그 소년에게 담임선생님은 가끔 동전을 주었다. 빵이라도 사먹고 허기를 면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준다고 해서 소년은 돈을 다 받는 게 아니었다. 애써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돈을 받곤 했다. 그 이유를 선생님은 곧 알게 된다. 자기 반에는 그렇게 점심을 못먹는 가난한 아이가 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제제가 돈을 받을 때마다 빵을 사서 그 가난한 아이와 함께 먹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아이는 제제보다 더 작고, 가난하고,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흑인 아이였다.

그러고 보면 베푼다는 것은 꼭 많이 가진 사람만 행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없는 사람이, 그리고 적은 것이라도 베푸는 행위는 있는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

가진 것이 비록 넉넉지 않더라도 그것마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눠줄 수 있는 그 어린 소년의 마음 씀씀이는, 나한테 필요 없는 것까지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들려줘야 할 대목이다. 꼭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나한테는 하등 소용없는 그 물건들은 이제 그만 좀 나눠줌이 어떨는지?

▼서로 손잡고 추운 겨울 넘기자▼

벌써 연말이다. 날씨도 날씨지만 올해는 극심한 경제한파 때문에 추운 이웃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넓게 열어 나보다 훨씬 더 추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그 관심과 사랑으로 인해 상대방은 물론 자기 자신 또한 더없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닷가 백사장의 모래알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있기에 아름다운 것. 그래야 외롭지 않고 그래야 허허롭지 않다는 것을.

서로 도와가며 사는 세상, 서로 마음을 열고 의지하며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신(神)은 우리에게 겨울을 내려주었다. 겨울이 왜 춥겠는가. 서로 손을 잡고 살라고 추운 것이다.

이정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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