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쳇바퀴’ 정치

  • 입력 2000년 12월 1일 19시 14분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 같은 정치였다. 올해도 벌써 12월, 저무는 한 해를 되돌아보면 푸념이 나온다. 희망의 새 천년, 뿌듯한 2000년대의 시작이라 해서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폭죽을 터뜨리던 신년맞이 감격이 엊그제만 같다. 그런데 정치는 과연 달라지고 바뀌기를 기대했던 우리에게 무엇을 채워준 것인가.

경제에 그림자는 깊어지고 폭락 부실 퇴출 실직 동투(冬鬪) 같은 우울한 단어로 얼룩진 이 섣달, 실망과 한숨으로 되묻게 된다. 왜 그리 정치에서는 십년 이십년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됩니까, 그럴싸한 2000년 첫해를 내내 그런 고장난 레코드에서 나는 듯한 소리로 지새워야 합니까라고.

정치의 키워드를 점검해 보면 빤하다. 안정의석론, 특별검사제, 금권 관권선거, 국회 날치기 통과, 야당의 등원거부, 대통령의 당적이탈과 거국내각, 검찰의 중립성, 지역편중인사, 국회의장의 당적문제…. 박정희시대 이래, 아니 자유당 정권 이래 신물나게 들어온 말들이다. 이것이 건국 반세기가 넘는 이 나라의 새 천년을 장식한 키워드들이었던 것이다. 정월부터 정치 안정론으로 다투었다. 민주당은 ‘총선에서 여당이 이겨야 정치가 안정되고, 그래야 개혁이 가능하며 남북대화도 잘된다’고 했다. 옛날 여당의 선거철 ‘지정곡’을 다시 틀어놓은 것이다. 한나라당은 다시 옛 야당의 전매특허를 고스란히 받아 ‘여당이 이기면 야당이 파괴되고 국정은 혼란해지며 집권측의 독선 오만은 더해갈 것’이라고 되쳤다. 여야 공수(攻守)교대에 따른 논리 맞교대일 뿐이다.

특검제 고함도 귀에 따가웠다.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 등에서 한나라당은 ‘특별검사만이 진상을 가릴 것’이라고 공세를 폈다. 마치 DJ 야당이 보라매공원에서 기세 올리던 모습을 연상케 했다. ‘특검제를 받아들인다면 갖고 있는 중대한 증거를 공개할 용의가 있다’고 몰아붙이던 그 야당 수법이 전승된 것만 같다. 물론 ‘검찰이 수사 중이므로 특검은 불필요하다’는 DJ정부의 응대도 옛적에 듣던 그 소리다.

야당의 ‘대통령 당적포기와 거국내각’ 주장도 노랫가락 후렴처럼 거듭 들려왔다. DJ는 야당 시절 대통령을 향해 ‘여당 당적을 버리고 전국민과 여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거국내각체제로 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번에는 한나라당이 그대로 들이댄다. 그러자 DJ여당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책임정치를 다하려면 당을 떠날 수 없다’고 맞선다. 옛적 여당의 그 소리다.

이런 숨바꼭질은 국회의장 당적이탈 논란에서도 계속된다. 여당의 날치기 시도와 야당의 국회 등원거부, 날치기 불가피론을 펴는 여당의 군색한 주장도, 그 여당을 몰아치는 야당의 기염도 낡은 필름 속의 재생처럼 표정과 목청이 똑같다. 새로울 것도 보탤 것도 없는 그야말로 구태의 재현이다.

남북문제에 관해선 그나마 좀 달랐다. 햇볕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워 집권한 DJ는 정상회담을 이뤄내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야당은 대북 비료지원을 반대하던 논리로, 여당이 평양에 함께 가자면 ‘그들의 대남통일전선전략에 놀아나니까 싫다’고 안 갔다. 야당 일각에선 “청와대는 친북세력이냐”고,“민주당은 노동당 2중대냐”고 마치 한강다리 꼭대기에서 자해소동을 벌이며 이목을 끄는 식의 발언도 나왔다. 기실 과거야당이 국회에서 ‘반공이 국시냐?’‘월남(越南)인사의 상당수가 친일파’라는 식으로 소동을 벌인 것과 닮은 꼴 아닌가. 내용이 달라도 수법 수준은 거기서 거기여서 실망스러운 국회, 변함없이 시끄럽기만 한 우리 정치의 참모습 아닐까.

그래서 한 해를 속아서 보낸 것만 같다. 뭔가 다를 것이라던 약속으로 야당이 여당되고, 여당은 야당으로 내려섰지만 무엇이 얼마나 다르다는 말인가. 그저 입장이 달라져 말이 달라졌다는 식의 정치를 지켜보면서 뻔뻔스러운 속임수 사기(詐欺)라고 느끼는 것은 내가 너무 민감한 탓인가. 지구촌은 돈도 물건도 국경 없이 흐르는 급격한 세계화로 치달아간다. 우리는 몇 뼘도 안되는 쳇바퀴 속의 어리석은 자전(自轉)으로 한해를 보내고 또 한해를 맞는다. 내년도 그 다음해도 쳇바퀴 정치의 ‘사기 틀’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우울하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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