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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1월 12일 19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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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의 노처녀. 노처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이지만 그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혼자 사는 여성이다.
만화가 김혜린씨. 올해 그의 작품 ‘비천무’가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대학 시절 그의 작품 ‘북해의 별’을 많이 읽었던 386세대 사이에서 그는 이미 스타 작가였다.
◆ "독자들 운명적 사랑 좋아해"
그는 경상대 국어교육과 재학 시절 편지를 통해 알게 된 만화가 황미나의 소개로 만화계에 입문했다. 그는 자신의 만화가 혁명(북해의 별), 무협(비천무), 사극(광야)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러브스토리’라고 말했다.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워 다시 한번 물어봤다.
“혹시 지금 생활에서 남자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닌가요.”
“모르겠어요. 남자가 시시한 건 아닌데,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네요. 물론 ‘뿅’가는 남자를 만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만화에는 ‘운명적 사랑’에 목숨을 걸고 모든 고난을 헤쳐나가는 여성이 꼭 등장한다. 그는 아직 운명적 사랑을 아직 못 만난 것일까.
“제 자신이 만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인물은 되기 힘든 것 같아요. 현실 속에서는 힘들지만 그런 걸 마음속으로 바라는 독자들이 많기 때문에 별 거부감없이 제 만화를 받아들이겠지요. 사실 어떤 사람의 사랑이든 운명적인 요소가 있어요. 그걸 만화 속에서 좀 증폭시켜 다루니까 더 운명적으로 여겨질 뿐이지요.”
◆ '불의 검' 2년만에 다시 연재
지난해 봄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한 뒤 ‘뎅가뎅가’ 놀았다. 82년 데뷔 이래 18년만에 처음으로 아무 것도 안하고 놀아봤다고. 그는 만화그리는 걸 ‘생명을 나눠주는 일’로 생각하지만 잠시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요즘은 다시 바빠졌다. 고대 유목민을 배경으로 한 ‘불의 검’을 2년만에 순정만화잡지 ‘화이트’ 11월호부터 다시 연재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이미 ‘불의 검’의 결말을 구상해 뒀다. 하지만 그 결말까지 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보여줘야할 수많은 연계 고리들을 찾기위해 고민한다.
“독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컷 하나 선 하나를 갖고 고민해요. 이걸 올릴까 내릴까 부드럽게 그릴까 강렬하게 그릴까 등 등. 마음에 안들 땐 내 자신이 초라해지죠.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있다’는 최면을 걸곤 해요.”
그는 18년의 작품생활 치고는 과작(寡作)에 속한다. 하나같이 역사를 바탕으로 한 진지하고 중후한 작품. 역사물만 그리는 이유에 대해 “제 작품은 ‘역사’라기 보단 ‘사극’에 가깝죠. 통속적이거든요. 남들은 이러쿵 저러쿵 분석을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다루는게 제 취향에 맞을 뿐이에요”고 말했다.
그는 ‘불의 검’ 외에도 ‘광야’라는 미완성 작품을 갖고 있다. 1920년대 일제시대부터 해방이후의 현대사까지 다루게 될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대단하다.
◆ "십수년이 걸려도 차분히 완성"
“‘광야’는 단기간에 끝내지 않고 십수년이 걸려도 차분하게 완성할 거예요. 박경리씨의 ‘토지’와 비슷하다고 하면 너무 벅찬 것이구요. 다만 만화만의 특성을 살린 본격 역사물을 보여주고 싶어요.”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특유의 낮은 목소리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낼로 뭐할라고 인터뷰하는데요”하며 난색을 표하던 김혜린씨. 만화만 부둥켜안고 바깥출입도 안하는 스타 작가의 괴팍한 습성인가 싶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소탈하고 수다스런 말솜씨에 금방 호감이 갔다. 그와 나눈 얘기 중 인상에 남는 한구절.
“자존심과 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자기 세계를 가질 수 있겠어요.”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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