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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0월 26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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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편의위해 허가청구 남발▼
우리 사회를 사생활의 비밀과 통신의 자유가 구현되는 자유로운 민주사회로 진전시키기 위해서 1994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이 역설적으로 오히려 통신의 자유와 비밀을 합법적으로 침해하는 수단으로 역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법률에 따르면 통신의 감청은 범죄를 의심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고 다른 방법으로는 범죄예방, 범인 체포 또는 증거수집이 어려운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 검찰이 법원의 감청허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수사기관은 범죄 수사의 편의만을 생각하고 통신감청의 허가청구를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더욱이 통신감청의 허가권을 갖고 있는 법원은 과연 통신의 비밀을 보호해야 하는 기본권 보호의 보루로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예외적으로만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에 한해서 감청허가를 해주고 있는지 냉정하게 반성하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수사기관의 관행으로 볼 때 감청허가 청구를 매우 엄격히 선별해서 하고 있다고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법원이 99% 감청허가를 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통신의 자유와 비밀이 사실상 감청제도에 의해서 형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정보화시대에 통신의 자유와 비밀의 보호는 사생활 보호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통신수단의 발달과 통신망의 확대로 인해서 이제는 통신에 의존하는 사생활의 영역이 예전에 비해 많이 넓어졌다. 그 결과 사생활의 영역이 집안이나 좁은 생활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초공간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따라서 국가가 사적인 통신의 내용을 길게는 6개월간 감청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국가가 국민의 내밀한 대화와 사생활 영역까지를 항상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중요한 핵심 통신업무가 국가에 의해서 독점되고 있어 국민은 좋건 싫건 국가의 통신업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간접적인 이용강제의 상황에서 국가의 무분별한 통신감청은 참으로 심각한 기본권의 침해가 아닐 수 없다. 설사 법률이 정한대로 그 감청내용이 공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민으로서는 공권력 앞에 알몸으로 서게 되는 기분이다.
통신감청허가제도는 반드시 제한적으로만 운용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원이 감청허가의 요건과 기준을 지금보다 더욱 엄격하게 제한해서 시행해야 한다.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률이 평균 25%를 넘는 것처럼, 통신감청도 보다 철저한 검토를 거쳐 최소한의 불가피한 경우에만 허가해 줘야 할 것이다. 그래야 통신의 비밀과 사생활의 보호는 헌법정신에 맞게 실현될 수 있다. 대화와 통신이 감청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염려 때문에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하고 살게 되는 사회는 건강한 열린 민주사회는 아니다.
지금의 통신비밀보호법은 제도적으로도 개선할 점이 많다. 우선 감청이 허용되는 범죄의 종류를 미국 독일 등 인권선진국처럼 ‘중대범죄’ 또는 ‘헌법침해범죄’로 한정해서 축소해야 한다. 지금처럼 내란죄에서 사기죄까지 거의 모든 범죄를 감청대상으로 삼는 경우 남용과 악용의 소지는 너무도 크다. 또 통신감청제도는 선진국의 예에 따라 이중적인 통제장치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회의 사후심사 의무화해야▼
즉 지금처럼 법원에 의한 사법적인 허가통제 이외에도 국회에 의한 대의적(代議的)인 통제장치를 함께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미국도 통신감청에 법관의 영장을 요구하면서도 반드시 의회의 사후심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독일도 통신감청에 대한 대의적인 통제를 위해서 연방의회에 5인의 의원으로 구성하는 감청감시위원회를 두고 이 위원회에서 임명하는 3인의 감청심사위원들이 독립적으로 감청을 통제하고 있다. 이런 선진적인 방향으로의 제도개선과 법원의 제한적인 감청허가를 통해서 통신감청사례가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줄어들지 않고는 국민의 사생활과 통신비밀의 보호는 한낱 허구적인 수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허영(연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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