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시호 /영어만으론 학문地平 못 넓힌다

  • 입력 2000년 9월 4일 18시 55분


지금은 바로 ‘영어시대’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냉정하게 사태를 보아야 한다. 과연 영어가 ‘알라딘의 등잔’인가? 일본의 영어 제2 공용어화 움직임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스 도브레가 “반드시 후회한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고 눈을 감고 진실을 보시오”라고 한 말을 음미해 봐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다음 두 가지 점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우리말과 글도 돌보고 가꿔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모국어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말과 글을 가꿔 학문어로서도 손색없는 언어 자산을 후손에게 물려 줄 의무가 있다.

우리말로, 한글로 쓴다고 해서 반드시 독창적 이론이 나오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영어로만 강의하고 글을 쓴다면 우리말은 학문어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마침내 고사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말은 한문에 의해서, 일본어에 의해서, 영어에 의해서 빈사상태에 빠져 있지 않은가. 그래서 외국말 개념은 반드시 번역해서 우리말로써 학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문체계의 중심에는 우리와 우리말이 서 있어야 한다. 괴테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뛰어난 외국어 교사였던 열린 민족주의자 헤르더는 학문체계의 중심에는 모국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성을 이룩할 수 있고 세계 보편성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전부가 우리말로, 한글로만 학문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영어가 세계어임은 엄연한 사실이며 세계에 우리의 연구성과를 알리기 위해서는 영어로 써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제안하고자 한다. 한글과 영어를 반반씩 쓰자는 것이다. 가령 평생 논문을 60편 쓴다고 했을 때 30편 정도는 한글로, 나머지는 영어로, 전공에 따라 프랑스어나 중국어로 발표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영어만 하면 영어권에의 종속성을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영어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한 쪽만 바라보는 사시적 편견에 빠진다.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어떤 한 언어라도 인류 지혜의 전부를 담을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해의 지평선을 넓혀 편견에서 벗어나자면 영어 이외의 외국어도 이해해야 한다.

지금 유럽연합(EU)에서는 ‘모국어 더하기 두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필자가 조사한 38개 주요 국가 모두가 복수의 필수 외국어, 다양한 외국어 학습의 기회 제공, 학습개시의 저연령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개 영어는 초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는 중고교에서 시작하고 있다. 다언어 교육 또한 대세다.

그렇다고 한 개인이 두 외국어를 마스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다언어주의에 의해서 비로소 우리는 모국어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고 우리의 정신적 자유의 공간을 확대할 수 있다.

정시호(경북대 교수·독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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