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그림읽기]김명국 '답설심매도'

  • 입력 2000년 8월 22일 18시 48분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주위가 하얗게 은세계(銀世界)를 이룬 가운데 한 선비가 짐 든 종자(從者)를 앞세워 길을 떠난다. 사립문에 기대 전송하는 동자는 잠이 덜 깬 듯 목을 잔뜩 움츠리고 등을 옹송그리며 소매 속의 손을 들어 매서운 바람을 가린다. 선비도 눈보라를 피하는지 아니면 아이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염려되는지 고개를 돌려 집을 바라본다. 이들의 옷은 맵시는 커녕 되통스럽기까지 하다. 머리를 귀까지 싸매고 넉넉하게 솜을 둔 겨울옷을 껴입었기 때문이다. 나귀는 이런 일에 벌써 이력이 났다는 듯 터벅터벅 내딛는 발 모양새가 체념을 넘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아마도 먼길을 갈 모양이다.

멀리 눈 덮인 흰 봉우리가 흐릿한 윤곽을 드러낸다. 날카롭고 각지게 힘찬 마른 붓으로 그려서 삼엄한 겨울 딱딱하게 얼어붙은 자연이 실감난다. 밤새 함박눈이 내렸을까? 아니, 양지 바른 집 근처 나뭇가지에 눈이 녹은 것을 보면 겨우내 묵은 눈 같다. 그러니 봄이 이제 멀지 않았다. 다리 아래 얼음 무더기는 녹아서 흘렀다가 다시 얼어 이곳에 쌓인 것이 아닌가? 오른편 아래 구석에 폭포가 꽁꽁 얼어붙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도 심술궂어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지난 겨울이 남긴 상흔일 뿐이다. 머지 않아 가지 위에 따스한 볕이 쪼이면 매화 봉오리가 살포시 실눈을 뜰지 모른다.

하지만 선비는 조바심에 가만히 집에 앉아 기다릴 수 없다. 저 남쪽 어딘가 눈발 속에 첫 봉오리가 벌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집 앞 나무는 가지가 메말라서 뼈만 남았다. 단지 나무뿐 아니라 산도 물도 모두 얼어 자연의 뼈다귀를 드러내었다. 이것이 감상자의 심금을 맑고 투명하게 울린다. 예각으로 틀어지면서 험상궂게 옹이를 드러낸 나무들. 잔가지 획을 게 발처럼 뽑아 그렸기 때문에 해조묘(蟹爪描)라 부르는 이 필법은 혹심한 추위를 견디는 꼬장꼬장한 겨울 나무의 혼이다.

겨울 끝머리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퍼뜨리는 농주미인(弄珠美人) 매화. 간밤 꿈속에 선비는 ‘구슬을 희롱하는 미인’을 보았다.

눈 밟고 매화 찾아가는 그림 ‘답설심매도’는 첫눈에 눈과 추위로 격리된 닫힌 공간을 보여 준다. 하지만 오른편 구석 강렬한 흑백 대비의 바위를 중심으로 집, 나무, 나그네가 우선 펼쳐지고, 다시 위태롭게 솟아오른 절벽과 원산이 부챗살처럼 퍼져나간다. 보는 이는 이가 시리게 매서운 추위를 느낄지 모르나 차가운 설경 속 눈서리를 무릅쓰는 선비의 마음 속엔 흐뭇한 봄의 설레임이 있다. 옛부터 겨울 그림은 고상하고 심지 굳은 선비들이 좋아했다. 자연이 길을 막아 절로 속세와 멀어진 뜻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겨울 그림은 무더운 여름에 감상하는 것이 제격이라 한다.

오주석(중앙대 겸임교수)josoh@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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