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 입력 2000년 7월 20일 11시 48분


원제: Mr. Smith Goes to Washington (1939)

감독: Frank Capra

출연: James Stewart, Jean Arthur, Claude Rains.

1989년 9월에 미국 역사상 최초로 25편의 영화가 ‘미국 필름문화재’로 선정되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미국 문화와 역사, 그리고 미학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들 작품이 의회도서관 내 국립필름등기소에 등록되어 영원한 미국 문화의 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25편의 목록을 살펴 보면 <모던 타임즈>(1936),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시민 케인>(1941), <카사블랑카>(1942), <스타워즈>(1977) 등 장르별·감독별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이 가운데 한 편이 바로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 1897-1991)는 시칠리아 태생의 전형적인 이탈리아 이민 1세대이다. 그는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어느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 1934)과 <디즈 씨 도시에 가다>(Mr. Deeds Goes to Town, 1936)를 비롯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세를 풍미한 헐리우드의 스크루볼 코미디 장르를 확립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1940년대 초까지의 영화들 속에서 카프라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를 통해 유머를 자아내는 한편 결국은 그를 약아빠진 세상에 대해 승리하는 영웅으로 만든다. 이들 촌뜨기 이상주의자는 전통적인 미국적 가치관의 대변자이다. 카프라가 193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감독으로서 미국 영화의 흥행기록을 갱신하면서 언론과 관객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도, 전후에 사회가 복잡성을 더해감에 따라 관객에 대한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그 비밀이 있다.

<아날>(Annales) 지의 책임편집인이기도 한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페로가 <역사와 영화>라는 책에서 제시하는 논의는 이 점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영화가 당대 역사관의 거울이라고 보는 페로는 미국 영화가 보여 주는 역사관이 네 가지 층위로 나뉜다고 한다. 첫 번째는 영화 등장 이전의 프로테스탄트적 기독교 이데올로기이고 두 번째는 19세기 말의 남북전쟁의 이데올로기이다. 이어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191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세 번째 층위를 이루는 역사관은 ‘인종의 용광로’와 ‘국민적 화합’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족적인 이데올로기는 그후 WASP 지배체제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인종적·성적·종교적 소수자 집단들의 ‘샐러드 그릇 이데올로기’라는 대항적 역사관으로 대체되었다.

여기서 세 번째 층위의 순응적 역사관을 잘 보여 주는 감독으로 페로가 거명하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프랭크 카프라이다.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들은 대단히 회유적이었으며, 늘 미국 체제를 정당화하다 못해 종내 찬양하면서 결국 거기에 동화되었다”고 보는 페로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루즈벨트 대통령이 카프라에게 직접 부탁해서 <우리는 왜 싸우는가>(Why We Fight)를 비롯한 일련의 애국적인 영화제작을 독려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증거가 있는가? 페로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를 보라”고 한다.

<스미스씨>는 <디즈씨>와 흡사하게, 도시로 간 촌뜨기 이상주의자의 시련과 승리라는 줄거리를 따르고 있다. 잭슨 시를 대표하던 상원의원 새뮤얼 폴리가 사망하자 주지사는 새로운 상원의원을 임명하게 된다. 미국은 각 주에 2명씩의 상원의원을 두고 있는데, 1913년의 연방 수정헌법 제17조 2항은 “주의회는 주민이 선거에 의하여 결원을 보충할 때까지 그 주의 행정부에게 임시로 상원의원을 임명하는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지사의 배후에는 제임스 테일러가 있다. 이 지역의 돈줄을 거머쥐고 있는 테일러는 주지사는 물론이고 하원의원들, 그리고 이 주의 또 다른 상원의원으로서 대통령 후보 자리를 노리고 있는 조지프 페인(클로드 레인즈 분)까지도 꼭두각시로 삼고서 ‘테일러 머신’(Taylor machine)이라고 할 정도의 거대한 금권정치 군단을 이루고 있다. 그는 域內의 테리 계곡 윌레트 천(川) 인근 토지를 차명으로 매입해 두고 이곳에 댐을 건설하는 법안을 상원에서 통과시킴으로써 地價 차익을 챙기려 하고 있다. 이제 새뮤얼 폴리가 죽었으니 그를 이어서 충실한 하수인 노릇을 해줄 상원의원이 필요한데 테일러는 호레스 밀러가 적임자라고 고집한다. 그러나 밀러가 테일러 군단 소속임을 잘 아는 시민들은 거세게 반발한다. 시민들의 비난과 테일러의 압력 속에서 고심하던 주지사에게 그의 자녀들이 한 사람을 추천하는데, ‘보이 레인저스’라는 소년단을 이끌고 있는 제퍼슨 스미스(제임스 스튜어트 분)가 그 사람이다. 아이들은 스미스가 미국 역사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얼마 전에 산불이 났을 때 이를 單身으로 진화한 영웅이자 위대한 미국인이라고 야단이다. 그는 ‘보이 스터프’라는 신문도 발행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던 주지사도 나중에는 생각이 바뀌어서 페인과 함께 테일러를 설득시킨다. “링컨과 제퍼슨을 읊어 대는 풋내기 애국자”라면 허수아비 역할을 맡겨도 안심이라는 계산이다.

결국 스미스는 상원의원이 되어 소년단과 시민들의 뜨거운 환송 속에 워싱턴으로 향한다. 워싱턴행 기차 안에서 스미스는 페인과 대화를 나눈다. 스미스의 아버지는 거대 악덕기업에 맞서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다가 결국 죽음을 당한 언론인이었는데, 변호사로서 그의 동지였던 사람이 바로 페인이다. “자네 아버지는 이룰 수 없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champion of the lost causes)였지.” 그러자 스미스는 묻는다. “혼자 거대한 조직에 맞서 싸우는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나요?” 페인은 대답한다. “그렇다네.”

워싱턴 역에 내린 스미스는 페인을 마중나온 딸 수잔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런데 ‘흑인’ 짐꾼들이 짐을 옮기는 사이 스미스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발칵 뒤집힌 의원 사무실로 그가 나타난 것은 다섯 시간이나 지난 뒤이다. 미국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는 스미스이지만 막상 빛나는 국회의사당 돔(Capitol dome)을 직접 보게 되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관광버스에 올라서 정신없이 여기저기 구경을 다녔던 것이다. 어이없어 하는 비서 클라리사 손더스(진 아서 분)에게 스미스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이야기한다. “링컨 기념관에 갔더니 링컨 대통령이 정말 거기 있더군요. 누군가 함께할 사람을 간절히 기다리는 듯한 눈빛으로 말이에요.”

입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거수기 노릇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스미스는 소년 캠프장을 건립해서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미국의 이상을 배우도록 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다. 재원은 정부가 조달하고 아이들의 성금으로 이를 상환한다는 것이다. 페인의 격려와 손더스의 협력 속에 스미스는 법안 작성에 들어간다. 스미스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理想이다. 자유의 나라는 나날의 삶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는 초원을 스치는 바람과 빛나는 태양과 흐르는 강물 속에서 몸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추잡한 의회정치에 진저리가 나서 비서직을 그만두려고 하던 손더스는 스미스의 진지함에 호감을 느낀다. 그런데 조상이 피로써 물려준 자유의 소중한 의미를 미국의 모든 소년들에게 체험케 할 캠프장의 건립지로 스미스가 생각한 곳이 하필이면 테일러 일당이 댐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윌레트 천변이다.

스미스가 법률안 제안 연설을 하면서 윌레트 천을 거론하자 페인은 대경실색한다. 페인은 딸 수잔을 이용해서 스미스가 댐건설 법안의 상정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따돌린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손더스는 질투와 함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스미스에게 테일러의 댐 건설 계획을 알리면서 “더 이상 동정심을 유발시키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내뱉고는 짐을 싸들고 나간다. 스미스의 항의를 받은 페인은 댐건설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둘러대면서 현실과 타협하라고 충고하고, 급거 상경한 테일러는 스미스가 정치가가 되고 싶다면 얼마든지 돈을 대주겠다면서 그를 매수하려고 든다. 결국 테일러와 페인 일당은 댐건설 법안에 이의를 제기하려던 스미스를 무고한다. 윌레트 천변의 토지를 미리 매입해 두고서 소년들의 코묻은 돈을 받고 이를 되팔아 이익을 챙기려고 한 파렴치한이라고 몰린 스미스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존경하던 페인까지도 위증을 하자 항변의 의욕마저 상실하고 징계위원회장을 뛰쳐 나간다.

다시 링컨 기념관. “망자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며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맞게 될 것이고,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링컨의 연설문을 다시 읽는 스미스는 기가 찬다. 낙향하려고 싸들고 나온 짐가방을 내려 놓고 눈물을 흘리는 스미스 앞에 손더스가 나타난다. “돌에 새겨진 미국적 이상 나부랭이나 좇는 철부지”라고 자신을 비하하면서 환멸에 빠진 스미스에게 손더스는 “링컨이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이라고 격려하면서 다시 돌아가 싸우도록 설득한다.

의사당으로 돌아온 스미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명 결정. 최후의 발언권을 겨우 얻은 스미스는 손더스가 일러준 대로 테일러 도당의 음모를 폭로하고, 고향 사람들에게 직접 호소하겠다면서 추경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議事進行妨害(filibuster)를 감행한다. 상원의사규칙상의 발언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스미스는 앉지도 쉬지도 못하고 발언을 이어간다.

스미스의 의사진행방해 장면은 이 영화뿐만 아니라 미국 영화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의사진행방해(filibuster)란 일반적으로 무제한적인 토론으로 정의되는데, 하원과는 달리 상원의 토론시간에는 제한이 없는 것을 이용하여 표결을 막음으로써 법안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사용된다. 최장 기록 보유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민주당 소속 스트롬 서몬드(Strom Thurmond) 의원으로서, 그는 1957년에 민권법 통과를 막기 위해 24시간 18분 동안 의사진행방해를 감행하였다.

스미스의 투쟁은 언론보도의 초점이 되지만 스미스의 주에는 그의 발언이 한 마디도 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를 중상모략하는 기사만이 판을 친다. 테일러 일당이 언론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더스는 스미스가 발행하던 ‘보이 스터프’를 이용해 보려고 하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아서 신문을 배포하고 진실을 알리려던 소년들만 다쳐 나간다.

23시간 16분을 넘어가는 스미스의 발언. 목도 쉬고 지쳐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이지만, 이제 모든 언론과 함께 동료 의원들도 그의 진실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때 스미스의 주에서 엄청난 양의 편지와 전보가 도착하는데, 그것은 모두 테일러 도당의 선전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 스미스를 비난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이제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 스미스는 편지들을 움켜쥐고 절규하다가 끝내 쓰러지고 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페인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자신의 비리와 스미스의 결백을 증언하자 모두들 환호성을 올리고, 자유의 종이 울리는 가운데 영화는 끝이 난다.

카프라 감독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 영화는 관객에게 커다란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안겨 준다. 그런데 <스미스씨>의 어느 구석에 페로가 말하는 순응적 역사관이 있고 또 미국 필름문화재로 선정될 만한 문화·역사·미학적 가치가 있단 말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미국의 시민종교’(American civil religion)라는 개념을 통하는 것이 최선일 듯싶다.

전통적으로 종교는 사회의 통합과 결속에 기여해 왔다. 일찍이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주목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종교란 한 사회를 단일한 도덕적 공동체로 결속시키는 성스러운 상징체계(symbolism)라고 하였다. 근대에 들어와 진행된 세속화(secularization)와 더불어 초자연적 상징체계는 점차 세속적 상징체계와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었지만 사회가 통합을 유지하려면 어떤 성스러운 상징체계가 존재해야만 한다. 즉 세속적 상징체계도 신성함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뒤르켕에 앞서서 루소는 <사회계약론> 제4권 제8장에서 종교의 정치적 기능을 논하면서, 국가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힘있고 슬기롭고 자비롭고 선견지명이 있고 자상한 신의 존재, 내세, 선인들의 행복과 악인들에 대한 벌, 사회계약과 법들의 신성함” 등을 교리로 하는 시민종교를 국가가 수립해야 한다고 하였다.

미국에는 국교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헌법상 가장 중요한 조항 가운데 하나인 수정헌법 제1조는 “연방의회는 국교를 설립하거나 자유로운 종교행위를 금지하는 어떠한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명저 속에서 토크빌은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이 오히려 미국에서 종교의 힘을 강화시켰다고 하였다. 종교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영역을 지킴으로써 확고한 도덕적인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공화정을 지탱하는 요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종교와 교육, 즉 국민들의 습속(manners, mores)이라고 보는 토크빌은 “종교가 미국 정치제도들 가운데 으뜸가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전제정치는 신앙이 없이도 통치할 수 있지만 자유정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 정치적 결속이 이완되는 만큼 도덕적 결속이 강화되지 않는다면 사회가 파멸을 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렇게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 사회의 결속을 위해서, 공통의 도덕적 신념을 위해서 공통의 종교가 필요하다는 루소, 뒤르켕, 토크빌 등의 견해를 배경으로 제기된 것이 바로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의 ‘시민종교 테제’(civil religion these)이다. 다원적인 사회인 미국에도 뒤르켕이 말한 바와 같은, 사회를 결속시키는 어떤 신성한 상징체계가 존재하는가? 벨라는 1967년에 “미국의 시민종교”라는 논문에서, 미국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제도화된 가치들이 비교적 현세화된 형태의 유대-기독교 전통(Judaeo-Christian tradition)에 기초를 두고서 하나의 시민종교를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인들은 자신이 ‘선민’이며 미국은 ‘약속의 땅’이자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인은 신과 ‘聖約’(covenant)을 맺었고 독립혁명은 구약에 나오는 ‘엑소더스’이며 남북전쟁은 신약에 나오는 십자가의 ‘代贖’이다. 결국 헌법은 성약이 되고 워싱턴은 모세가 되며 링컨은 예수가 된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기독교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독자적인 상징체계, 즉 準신화적인 역사와 영웅 및 성자들, 그리고 신성한 국경일 및 儀式들을 수반하는 것이다.

<스미스씨>는 벨라의 시민종교 테제를 증명하는 수많은 자료들로 가득하다. 스미스가 미국 역사에 대해 박식하다는 것은 그가 시민종교의 독실한 신자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스미스가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어디를 찾아갔겠는가. 먼저 “법 아래의 평등한 정의”라는 문구가 새겨진 연방대법원 청사, 백악관, 헌법로, 펜실베이니아로, 그리고 국회의사당이다. 이어서 미국의 건국과 발전 과정에 대한 상징적 묘사가 제시된다. 제퍼슨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연방헌법전이 나오고, 자유의 종이 울리는 가운데 “자유, 생명, 행복추구”라는 문구가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애덤즈, 해밀턴 등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의 모습이 나오고, 힘찬 國歌와 펄럭이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조지 워싱턴과 워싱턴 기념탑, 그리고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등장한다. 이윽고 배경음악이 군가로 바뀌면서 스미스는 무명용사 묘지를 거쳐 링컨 기념관에 당도한다. 카메라는 거대한 링컨 대리석상과 북쪽 벽에 있는 두 번째 취임사를 비춘 다음 남쪽 벽에 새겨진 게티스버그 연설문에 머문다. 이 연설문을 백인 노인이 손자에게 읽히는 사이 흑인 노인 한 명이 조용히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상원 개원식이 있던 날 오전에 스미스가 찾아가서 각오를 다진 곳, 마운트 버논(Mount Vernon). 조지 워싱턴의 저택이 있는 곳이자 그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벨라의 테제에 비추어 볼 때 이 모든 장소들은 ‘국가적 祠堂’으로서, 스미스는 시민종교의 성지들을 순례하며 참배했던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최근에 만들어졌다면 스미스는 링컨 기념관에 가기 전에 그 근처에 있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1982)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물(1995)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시민종교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그 경전이다. <스미스씨>에 나오는 경전으로는 우선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 있다. 남북전쟁의 분기점이 된 1863년 7월의 게티스버그 전투의 현장에 국립묘지를 세우면서 그해 11월 19일에 행한 링컨의 이 2분 짜리 연설은 미국 건국의 이상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극명히 묘파한 불멸의 경전이다. 그러나 미국 시민종교의 경전으로서 으뜸가는 것은 역시 의사진행방해 과정에서 스미스가 낭독하는 문서들, 즉 독립선언문, 연방헌법전, 그리고 성경이다. 이 가운데 특히 헌법과 시민종교의 관계는 특기할 만하다. 미국인들은 연방헌법에 대해서 ‘헌법 숭배’(worship of the Constitution)라고 할 정도의 경외심을 보여 왔다. 막스 러너는 미국에서 헌법이 “적대적인 우주의 미지의 힘들을 제어하는 도구”, 즉 ‘토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것은 성경과 高次的 권위에 대한 복종에 익숙한 기독교 전통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지적한 바 있다. 최근에 법학자 레빈슨은 <헌법적 신앙>이라는 책에서 헌법 숭배와 종교 신앙 사이의 유사성에 기초해서 미국의 헌법해석 논쟁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반면에 카톨리시즘에서는 성경 이외에 교회의 전통도 권위의 원천으로 삼는다. 마찬가지로 헌법 해석에서도 오직 헌법 문언에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해석주의)과 공동체의 근본원리 등을 ‘불문의 헌법’(unwritten constitution)으로 보고 이것에도 권위를 인정하는 입장(비해석주의)이 대립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방대법원만을 권위있는 최종적 헌법해석자로 이해하는 입장과 이를 부정하는 입장도 대립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카톨리시즘의 대립과 유사한 대립이 헌법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미국에서 헌법이 시민종교의 경전임을 간접적으로 입증해 준다.

이쯤 되면 미국 의회도서관이 왜 <스미스씨>를 ‘공적으로’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가 이해될 것이다. 이 영화는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미국의 시민종교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런데 마르크 페로는 왜 프랭크 카프라 감독과 이 영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스미스씨>에 대한 미국 의회도서관의 평가와 마르크 페로의 평가는 미국 시민종교라는 동전의 상이한 면을 각각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 이것이 해답이다.

미국 영화의 역사관에 대한 마르크 페로의 분석은 시민종교 테제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적 기독교 이데올로기와 남북전쟁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인종의 용광로’와 ‘국민적 화합’의 이데올로기는 모두 미국 시민종교의 교리를 구성하는 신념들이다. 원래 시민종교는 국가를 초국가적 가치에 종속시키면서 현실비판적인 “예언자적”(prophetic) 역할을 담당하는 이상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링컨과 남북전쟁이 그렇게 중요한 지위를 부여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벨라는 여기에 근거해서 미국의 시민종교가 미래에 도래할 “세계 시민종교”(a world civil religion)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시민종교가 이러한 이상주의를 상실하게 되면 “종교적 민족주의”로 변질되어 벨라의 표현처럼 “깨어진 성약”(broken covenant)이라는 상황이 빚어진다. 페로가 자족적인 ‘순응적 역사관’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실 미국사의 초기에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신념은 인디언에 대한 백인의 박해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남북전쟁을 통해 흑인에게까지 확대되었지만 법적인 평등이 사실적 평등까지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자유를 수호한다는 세계사적 사명 아래 수행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에 다름아니라는 강력한 항의에 부딪쳤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헌법을 수호하는 사제로서의 미국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휘날리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의 표본이 레이건 시대의 <람보> 시리즈(1982, 1985)라면, “깨어진 성약”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대표하는 감독은 <살바도르>, <플래툰>, <7월 4일생>, , <닉슨>을 만든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1946- )이 아닐까. 성조기가 불타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스파이크 리(Spike Lee) 감독의 <말콤X>(1992)는 페로가 말하는 네 번째 역사관, 즉 ‘샐러드 그릇 이데올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리고 외계인의 지구 침략을 분쇄하기 위해 출동하는 지구방위군 앞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오늘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자 전세계의 독립기념일”이라고 연설하게 할 때, <인디펜던스 데이>(1996)는 미국의 시민종교가 ‘세계 시민종교’의 일부가 되느냐 ‘패권적 아메리카니즘’이 되느냐 하는 기로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영화가 된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를 보면서 우리는 수많은 자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을 결속시키는 이념은 있는가? 그러한 이념은 있어야 하는가 없어도 되는가? 우리에게 헌법은 무엇인가? 우리의 정치영화는 어디쯤 와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국회는, 우리의 이상주의자는?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럽다.

안경환(서울대 법대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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