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전진우/'작은 반란'

  • 입력 2000년 7월 13일 19시 18분


‘작은 반란’

“장이사장을 뽑는 것이 청와대의 뜻입니다.”

“정원식총재가 그동안 잘해 왔고 남북관계에도 정통하므로 한번 더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의 뜻을 존중합시다.”

“아니 언제 적에 하던 얘기를 아직도 하는 겁니까. 민주적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무기명투표를 합시다.”

12일 신임 대한적십자사 총재 선출을 놓고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위원들간에 벌어진 설전이다. 정부측 위원들이 ‘대통령의 뜻’을 앞세우고 민간측 위원들이 반발한 이 해프닝은 두 차례의 정회 끝에 주무장관인 보건복지부장관까지 급히 달려와 양해를 구하면서 결국 ‘청와대 뜻’대로 장충식단국대이사장이 새 총재로 선출됐다고 한다.

▷한적총재는 최고의결기관인 중앙위원회의 선출을 거쳐 대통령의 인준을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동안은 정부가 추천한 인사에 대해 만장일치로 손을 들어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추천한 군장성 출신을 보이콧한 적도 있었다지만 그 후로는 정부가 지명하는대로 총재가 됐다는 것이다. 하기야 이 정도는 ‘관례’가 ‘제도’를 지배하는 한국형 ‘얼치기 민주주의’의 작은 예에 불과 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반세기 ‘민주화’는 우리 사회의 변함없는 주요 의제였다. 그러나 우리의 권력 제도 관습 의식에 잔존해 있는 전근대적 비민주성은 여전하다. 법치(法治)보다는 인치(人治)가 앞서고, 제도와 절차보다 사적(私的) 연줄에 의한 정실주의와 연고주의가 판친다. 공직에 낙하산 인사, 특정 지역 출신 편중인사가 정권을 이어가며 되풀이된다.

▷당연한 절차를 밟자는 것이 ‘반란’으로 비쳐져서야 민주주의를 말하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하물며 언제나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이 정부의 행태마저 ‘언제 적에 하던 짓’에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으니 한심스럽다. 위정자들은 이번 한적총재 선출에서 보여진 ‘작은 반란’의 큰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달라진 것을 모르면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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