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영래/정치자금 실명제 서둘자

  • 입력 2000년 6월 8일 19시 43분


워크아웃 상태의 부실기업 회장이 경영개선 노력을 통해 회사를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비자금을 마련해 선거 때 뒷돈이나 대주었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동아건설이 4·13총선 때 100여명의 후보자에게 10억원대의 정치자금을 지원한 것은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검은 돈에 의한 정경유착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3조원 이상의 부실채권을 안고 있는 기업이 수억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으니 자금 사정이 비교적 좋은 기업들은 얼마나 주었겠는가.

검은 돈을 준 기업도 문제이지만 부실기업으로부터 검은 돈을 받고도 이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은 정치인은 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은 워크아웃 기업이 어떻게 막대한 선거자금을 줄 수 있느냐고 야단인데 아직도 동아건설로부터 선거 때 후원금을 받아 사용했다고 떳떳하게 밝히는 국회의원은 없다.

검은 돈을 정치자금으로 받는 데 익숙한 기성 정치인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국회에 입성한 소위 386세대 정치인조차 묵묵부답이니 386세대나 기성정치인 모두 정치자금에 관한 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인 것 같다.

후보자들은 4·13총선에서 사용한 선거비용 보고서를 각급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여 현재 선관위는 국세청 직원까지 동원해 실사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후보자들은 평균 법정 선거비용 1억2600만원의 절반 정도인 6300여만원밖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신고하였으니 이런 엉터리 보고서를 국민이 믿겠는가.

중앙당에서 지원한 선거자금도 특정 선거구는 수억원이 되며 동아건설을 비롯한 기업에서 받는 정치자금도 상당하다는데 고작 6000여만원의 내용을 실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부 후보자는 지출보다 수입이 많다고 신고한 경우도 있는데 선거에 이기고 돈도 남는 장사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검은 돈에 의한 정경유착이 가능한 것은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의식도 문제지만 선거법과 정치자금법도 검은 돈을 제도적으로 차단할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법규에 의하면 정치인들은 선거 때 후원금으로 받으면 후원금 총액만 선관위에 보고하면 된다. 아무리 검은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도 말썽이 되지 않으면 그만이고 혹시 문제가 되면 사후에라도 후원금으로 받은 것처럼 둔갑시켜 처리하면 된다.

정치자금에 관한 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기업도 좋고 정치인도 좋은 얼마나 편리한 제도인가. 현재 선관위에서 실사를 하고 있는 선거비용보고서에는 선거자금 기부자의 명단과 액수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나중에 말썽이 되면 후원금으로 처리하면 문제가 되지 않으니 검은 돈을 받은 정치인들은 겁낼 필요가 없다.

정치권의 검은 돈을 차단하기 위해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위한 정치자금 실명제 도입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정치인은 정치자금 관리를 위한 별도의 은행계좌를 개설해 관리토록 하고 또 100만원 이상의 정치자금은 반드시 수표로 기부토록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동아건설처럼 1만원권 현찰로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미국은 100달러 이상은 수표로 기부토록 해 투명성을 확보하고 있다. 후원금 보고도 총액만 보고하여 법망을 피할 수 있도록 하지 말고 후원인 성명, 후원 액수 등 구체적인 내용을 보고토록 정치자금법과 선거법을 개정해야 된다.

정치를 하는데 정치자금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검은 돈에 의한 정치부패의 온상이 되어 필요악이라고 한다. 정치자금은 잘 쓰면 민주주의를 위한 보약이지만 검은 돈이 지배하면 독약이 된다. 더 이상 독약이 되기 전에 동아건설 선거자금 살포 사건 등을 철저하게 조사해 강력한 처벌을 해야 된다. 검은 돈에 의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국민이 기대하는 ‘개혁정치’ ‘깨끗한 정치’는 요원하다. 국회도 정치자금법과 선거법을 조속히 개정해 검은 돈이 정치권에 유입되는 것을 차단해야 된다.

김영래(아주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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