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현진/기업 해외매각 이래도 되나?

  • 입력 2000년 4월 23일 20시 56분


삼성차 채권단과 프랑스 르노간의 4차협상이 파리에서 열리던 지난 21일. 국내에서 상황보고를 받던 한 채권단 관계자는 이건 협상이 아니다. 차라리 깨졌으면 좋겠다 고 푸념했다. 르노측의 협상 태도가 지난 협상때와 완전히 다르게 고자세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협상 종료 몇시간 전까지도 인수조건 등에 합의하면 최종 인수가액을 제시하겠다 는 식의 협상상식에 어긋나는 제안까지 해왔다는 것.

사실 삼성차 채권단 협상팀이 파리로 출국하기 전 이같은 상황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정부가 18일 경제정책의 최고 협의기구인 경제장관감담회에서 삼성차를 우선협상기한 만료일(21일)까지 매각하도록 채권단을 독려하겠다 고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르노측이 지난달 2,3차 협상때만 해도 유연한 자세를 보여 채권단의 기대를 부풀게 했지만 정부의 이 발언 하나로 협상팀의 손발은 완전히 묶여 버린 셈이다. 정부가 파는 쪽을 급하게 만들었던 결과로 채권 금융기관은 매각손실을 고스란히 떠 안을 수 밖에 없게 됐다.

문제는 정부의 이같은 태도가 삼성차 매각의 단일 사안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우 워크아웃을 추진중인 한 채권은행 관계자는 일부 워크아웃 기업은 채권단 경영관리아래서 충분히 기업가치를 높혀 채권을 회수할 수 있는데도 정부는 대외신인도 제고차원에서 가급적 조속히 매각하라고 권유하고 있어 고민 이라고 털어놓았다.

이헌재(李憲宰)재정경제부 장관은 금감위원장 시절부터 기업매각은 속도보다 제값 받는 것이 우선 이라는 원칙을 누차 밝혀왔으나 그 원칙을 현장에서 발견한 사례는 드물다.

물론 매각 지연으로 인한 대외신인도 하락을 걱정하는 정부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부는 시장주의를 부르짖는 만큼 필요할 때 침묵하는 방법 을 서둘러 배워야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국부유출 논쟁이 두고두고 정부를 괴롭힐 수 있다.

박현진<경제부>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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