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장애인 편의시설' 法 있으나마나

  • 입력 2000년 4월 9일 20시 21분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법에 규정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외면하고 있다.

98년 4월 제정된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은 올 4월10일까지 관공서 종합병원 버스터미널 등 공공장소에는 반드시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설치는커녕 아직 계획조차 마련하지 않고 있다.

본보 취재팀이 장애인의 날(4월20일)을 앞두고 조사한 결과 편의시설을 제대로 설치한 곳은 대상 공공기관의 절반도 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태▼

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의 한 동사무소를 찾은 지체장애인 김모씨(42)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민원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경사로가 없어 휠체어를 탄 김씨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 직원들의 도움을 요청할 장애인용 벨도 없었다.

김씨는 지나가는 주민에게 부탁해 직원을 내려오게 한 뒤 그의 도움을 받아 민원실에 올라갔지만 앞으로 또 동사무소를 찾을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앞섰다.

동사무소측은 “얼마 전에야 예산을 배정받았다”며 “곧 장애인 편의시설 공사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편의시설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이용이 불가능하거나 불편한 곳도 적지 않다.

8일 정오경 서울 S세무서. 민원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경사로가 설치돼 있었지만 경사가 너무 급해 장애인 혼자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었다. 보통 높이 1m당 경사로의 길이가 8∼12m는 돼야 하는데 이곳은 5m밖에 안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해 말 현재 서울시내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대상 13만6823곳 가운데 48.2%인 6만5998곳만 설치된 것으로 조사됐다”며 “그동안 추진 실적으로 볼 때 법이 정한 의무시한(4월10일)을 지킨 곳은 50∼60%에 불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장소별로 보면 구청보다는 동사무소의 설치비율이 낮다. 서울시 조사 결과 25개 구청의 경우 설치대상 607곳 중 450곳(67.1%)에 편의시설을 설치했으나 동사무소는 설치대상 3862곳 중 57.4%인 2218곳에만 편의시설을 설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각 청각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은 더욱 보잘것없는 실정이다.

부산시내 횡단보도의 경우 휠체어 장애인을 위해 보도 턱을 낮춘 곳은 전체의 66.6%에 달하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점형 블록이 설치된 곳은 2.3%에 불과하다.

▼대책▼

‘편의증진법’에는 10일까지 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으면 시장 군수 명의로 개선명령을 내리고 1년이 지나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나 3000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물리도록 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는 아직 관내의 편의시설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아직 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공공기관의 경우 한결같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지나 성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설치 의무시한은 10일까지지만 미설치로 인한 과태료나 이행강제금은 1년 뒤부터 부과되기 때문에 상당수의 공공기관이 “내년 4월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

서울시 관계자는 “7월까지 실태조사를 벌인 뒤 설치를 적극 독려해 2004년까지는 주요 시설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율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릴 방침”이라고 말했다.

장애인 편의시설 촉진 시민연대 배융호(裵隆昊)연구실장은 “98년 법제정 이후 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계획조차 세우지 않은 곳이 많은 것은 그만큼 장애인 복지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증거”라며 “공공기관이 이처럼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민간건물이나 시설 소유주들은 더욱 무관심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서정보기자·부산=조용휘기자> suhcho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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