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메일]김희경/스왱크가 여우주연상 받기까지…

  • 입력 2000년 3월 31일 21시 06분


<<동아일보 영화담당기자인 김희경씨의 영화칼럼이 씨네존에 게재됩니다. 91년 동아일보에 입사, 98년 3월부터 영화담당기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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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해 아카데미賞▼

투표용지와 트로피까지 잃어버리고,시상식 하루 전날 '월스트리트 저널'지에 주요 부문 수상자가 미리 보도되는 등 유난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놀라운 결과는 힐러리 스왱크의 여우주연상 수상입니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자신을 남자라고 생각하는 여성인 티나 브랜든 役으로 열연한 힐러리 스왱크는 연기로만 보면 당연히 수상감이지요. 남장 여성이 주인공인 탓에 관객은 그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보게 되지만 힐러리 스왱크의 연기는 거의 '연기'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촬영전 머리를 짧게 깎고 실제로 한 달간 남장을 하고 지냈으며, 킴벌리 피어스 감독에게 자신이 실존인물인 티나 브랜든과 같은 나이인 21살이고 티나 브랜든의 고향인 링컨시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이 역할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다시피 했습니다.

▼힐러리 스왱크 "우리는 너무 먼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대부분 늙고 보수적인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들에겐 아주 부담스러웠을 영화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자유를 갈망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가여운 한 젊은이의 일생은 너무나 참혹하고,그래서 가슴을 저미는 통증없이 끝까지 보아내기가 힘든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남장 여성의 섹스 장면이나 차마 똑바로 보기 어려운 성폭행 장면 등도 편안한 감동을 좋아하는 아카데미의 성향에 맞지 않지요.

그래서인지,여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된 뒤 무대에 오른 힐러리 스왱크의 첫 인사말도 "We've come a long way"였습니다. 아주 먼 길을 걸어왔다는, 또는 그동안 우리가 많이 진보했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는 이 말은 보수적인 아카데미가 性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남장 여성의 역할을 한 자신에게 비중있는 상을 안겨준데 대한 감탄과 놀라움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힐러리 스왱크의 수상이 놀라운 또 하나의 이유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소재 뿐 아니라 이 영화가 200만달러밖에 안되는 돈으로 만들어진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점입니다.

이 영화를 포함해 올해 아카데미상 수상작과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주류에 속한 스튜디오 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는 갈수록 희미해져가고 있는 듯합니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등 5개 부문에서 수상한 '아메리칸 뷰티'도 제작비가 1500만달러 밖에 안돼 5000만 달러에 육박하는 할리우드의 평균 영화제작비에 비하면 '작은 영화'이지요. 또 트레이 파커가 만든 불온하고 대담한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의 '블레임 카나다'가 주제가상 후보에 올라 시상식장에 울려 퍼진 것이나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감독상 후보에 오르고 독립영화 '텀블위즈'의 자넷 맥티어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지금까지 '잉글리시 페이션트''타이타닉''라이언일병 구하기''셰익스피어 인 러브'처럼 '큰 영화'들을 선택해왔던 아카데미는 이제 독립영화, 창의성과 실험정신이 빛나는 작은 영화들에서 미국 영화의 미래를 발견하기 시작했나 봅니다.

반면, 이전보다 더 뚜렷해진 경향이 있다면 아카데미가 '나이든 남자와 젊은 여자'를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이콜로지컬 리포트'지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25년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들의 평균 나이는 40.3세, 남우주연상 수상자들의 평균 나이는 45.6세로 약 5년 차이가 납니다. 조연상 수상자들로 가면 나이 차이는 더 벌어지는데 여우조연상 수상자들은 평균 41.8세, 남우조연상 수상자들은 51.9세라고 합니다. 그래미상과 에미상 수상자들까지 다 분석해보면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조합이 더 뚜렷해진다고 하네요.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조합 뚜렷▼

올해 수상자들의 나이를 보면 이런 경향은 한층 더 짙어진 것같습니다.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힐러리 스왱크는 26살, 여우조연상을 탄 안젤리나 졸리는 25살입니다. 반면 남우주연상을 탄 케빈 스페이시는 41살, 남우조연상을 탄 마이클 케인은 67살이죠.

그러고보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26)는 '타이타닉'이 상을 휩쓸던 9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예 후보에 오르지조차 못했지요. '중앙역'으로 지난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브라질 여배우 페르난다 몬테네그로(70)는 "기네스 팰트로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탄 것은 그의 재능 때문이 아니라 젊고 예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글쎄요. 올해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힐러리 스왱크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한다면 온당치 않을 것같습니다. 스왱크는 "예쁘지 않아도 재능 때문에" 수상을 하게 된 경우니까요. 하지만 점점 더 뚜렷해지는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조합에 몬테네그로처럼 경륜이 풍부하고 원숙한 여배우들이 억울해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이건 나이 든 여자에 대한 차별인 걸까요. 아니면 연기력이 절정에 오르기까지의 기간이 여자보다 남자가 더 길기 때문인 걸까요.

▼경황중에 빠뜨린 '울고 있는 남편'에 대한 감사 ▼

사족이지만,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달콤했던 순간은 힐러리 스왱크가 무대에서 인사말을 할 동안 객석에 앉아 있던 그의 남편 차드 로위의 뺨위로 눈물이 흐르던 모습이 아니었나 합니다. 아마 시상식 중계를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소년은 울지 않는다(Boys don't cry)'의 주연배우가 상을 탈 때 그의 남편이 우는(Boy does cry), 이 역설적인 광경을 인상깊게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 힐러리 스왱크는 감독과 도와준 사람들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감사 인사를 해놓고 하필 눈물까지 흘려가며 기뻐하던 남편 이름을 빠뜨렸어요. 시상식후 무대 뒤에서 기자들로부터 왜 그랬냐는 질문이 쏟아졌다는데 스왱크는 "경황이 너무 없어 깜빡 했다. 무대에서 퇴장하면서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고 민망해 했다고 합니다. 그가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다시 갖기가 쉽지 않을텐데, 안타깝네요.

김희경<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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