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창호- 조훈현, 여자앞에 서면 약해지는가

  • 입력 2000년 3월 7일 20시 06분


20여년간 ‘바둑천하’를 세습하다시피 지배해온 조훈현-이창호 9단 사제(師弟)가 최근들어 ‘반상의 여전사’들에게 잇따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

조훈현 9단은 6일 KBS바둑왕전 16강전에서 17세의 박지은 2단에게 불계패로 일격을 당했다. 흑을 쥔 조 9단은 242수만에 불계패로 두손을 들고 말았다.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동아일보 주최의 43기 국수위를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에게 내준 것은 그렇다고 해도 이번 패전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 2단이 최근 여류명인을 차지하는 상승세라는 점을 감안해도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3일 조 9단의 제자이자 세계 최강으로 군림해온 이창호 9단도 ‘KBS특별대국’에서 루이 9단에게 완패했다. 백을 쥔 이 9단은 루이 9단의 힘에 밀려 161수의 ‘단명(短命)’으로 불계패를 당했다. 비록 공식 기전이 아닌 이벤트성 대국이라고 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1인자의 명예는 상당히 실추된 게 사실이다.

이 9단은 세계 랭킹 1위이면서도 일본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에 이어 또 한명의 천적을 갖게 됐다. 앞으로 주요 기전에서 숱하게 만날 루이 9단과의 역대 전적 1승3패는 상당히 부담스럽다. ‘루이 해법’이라도 따로 연구해야 할 판이다.

조 9단은 어떨까. 승부의 세계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 해도 결코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 루이의 등장 이전만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 남성 기사가 여성에게 지는 것은 ‘사건’으로 여기는 게 바둑계의 분위기였다. 그럴만큼 남성과 여성의 기력은 서로 다른 성(性)만큼 넘을 수 없다는 격차가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조 9단은 40년에 가까운 바둑인생 중 올해 처음으로 여성 기사에게 연거푸 세 번이나 지는 ‘수모’를 당했다. 국수전 도전기에서 루이 9단에게 당한 1승2패를 포함해 조 9단의 대 여성기사 전적은 1승3패.

왜 그럴까. 여성 기사들의 기력 상승도 원인이지만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 9단이 열쇠를 갖고 있다는 흥미로운 해석도 있다. 유 9단은 루이 9단(2승1패) 박 2단(2승)에게 모두 우위를 보이고 있다. ‘철녀(鐵女)’라는 별명의 루이나 ‘여자 유창혁’으로 불리는 박 2단의 기풍은 적당한 선에서 싸움을 멈추는 스타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대방의 대마를 노리는 ‘사생결단’형이다. 비교적 기풍이 비슷한 유 9단이 두 ‘아마조네스’를 상대하는 노하우를 갖고 있는 반면 ‘지키는’ 바둑에 능한 이 9단이나 싸우면서도 실리를 챙기는 조 9단은 상당히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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