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개방사회의 문화 법률 분쟁

  • 입력 1999년 10월 7일 19시 33분


세계 최대의 자동차업체인 GM의 부품공장이 들어선 미국 미시간주 플린트에서는 지난해 6월 노조의 전면 파업이 벌어졌다. 회사가 노조와 합의한 안전보건 관리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노조지도부는 파업절차가 불법이라는 시각에도 불구하고 GM 경영진이 아시아 국가나 멕시코 등 인건비가 싼 지역으로 공장을 옮기려 한다고 의심해 공장 이전계획을 철회시키려는 우회 압박 전략으로 파업을 했다.

7주간 계속된 파업으로 회사는 22억달러에 달하는 손해를 입었다. 마침내 경영진은 과거 11년 동안 노사분쟁 중재를 맡았던 변호사에게 “파업이 불법임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중재 변호사가 실제 조사에 착수한 기간은 단 4일. 중재인이 불리한 결정을 내릴 것을 우려한 노사 양측 모두 서둘러 한걸음씩 양보해 노사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갈등이 소송으로 비화되면 ‘22억달러를 누가 물어내느냐’는 문제를 놓고 지루한 소모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미국 미네소타주는 민사소송에 수년 전 ‘조기평가(早期評價)제도’를 도입해 소송시간 및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거두었다. 소송이 제기돼 증거를 조사하기 전에 원고와 피고측 변호사들이 사건의 핵심 쟁점을 제시하면 중립적 평가자가 ‘원고 논리는 이 점에서 유리하고 피고 주장은 이 점에서 취약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제도다. 소송 도중 화해를 유도할 수 있고 화해가 어렵더라도 증거조사를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민사분쟁이 터져 설득 회유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해결이 안될 때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법원이다. 그러나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법원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에 이처럼 ‘대체 분쟁해결장치(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를 동원해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가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있다.

특히 지구촌의 경제 국경을 가르는 장벽이 갈수록 낮아져 국제거래에서 분쟁이 빈발하면서 이같은 해결방안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지난해 8월 한국 국방부와 미국 방산업체간 헬리콥터 도입계약을 둘러싼 부당이득 반환청구 소송에서 한국에 패소 결정을 내린 국제중재법원은 대표적인 민간 중재기관이다.

법무법인 전문가들은 ‘빅딜 중의 빅딜’로 알려졌던 연초 현대전자와 LG반도체(현재 현대반도체)의 경영주체 다툼이나 삼성과 대우그룹의 삼성자동차 자산가치 평가 등도 넓은 의미에서 ADR에 포함시킨다. 중립적인 평가기관이나 회계법인에 맡겨 이견을 좁힘으로써 분쟁 해결을 시도한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견해다.

삼성중공업은 지난해 9월 발표한 빅딜 원칙에 따라 한국중공업에 넘기기로 한 보일러 및 선박용엔진 설비의 자산평가를 외국계 은행에 맡겼다가 이달 초 “평가절차가 불공정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절차가 간단하고 돈도 적게 드는 ADR이지만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ADR에는 중재(仲裁), 조정(調停), 화해, 조기평가, 중립적인 사실판단, 약식재판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해 당사자들의 합의만 이루어지면 여러 분쟁해결 방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아예 법원을 찾지 않고 분쟁 당사자들이 중립 기관을 찾아 구속력을 갖춘 결정을 구하는 중재가 특히 대형 민사사건에서 새로운 ‘해결사’로 부상하고 있다.

94년 사채시장의 대형 전주(錢主)였던 L씨는 K호텔 소유주인 P씨로부터 3년간 위탁 경영하다 돌려주는 조건으로 호텔을 넘겨받기로 했다. 그러나 호텔직원들이 가입한 호텔상조회의 실력저지로 여의치 않게 되자 P씨에게 “손해액 11억원을 배상해달라”고 요구했고 P씨는 “실력저지는 불가항력이었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맞섰다.

다행히 L씨와 P씨는 계약서를 쓸 때부터 분쟁시 대한상사중재원에 맡기기로 합의했던 터라 중재원은 “L씨가 인사문제 등 사전 인수 준비에 소홀했던 점이 인정된다”며 손해 배상액을 1억1000만원으로 축소해 결정했다.

66년 제정된 중재법은 분쟁 당사자가 일단 중재에 합의하면 중재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한상사중재원의 진규호(晉奎浩)전문위원은 “일반 소송과 달리 2,3심의 심리를 받을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어 당연히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말한다.

사건내용과 변호사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일반적으로 1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법원에 소송을 내면 1000만원 정도의 비용을 각오해야 한다. 상급심까지 소송이 이어지면 기간도 1년을 넘기기 일쑤다.

일부 변호사들은 당장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해 소송을 끝까지 진행할 것을 권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반면 중재를 통하면 비용은 각종 요금 경비 수당을 합쳐 300만원 안팎. 시간도 길어야 6개월을 넘기지 않는다. ‘신속절차 제도’를 활용하면 10일 이내에 분쟁해결을 시도할 수도 있다.

물론 중재방식에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재인이 오판했을 때 결정을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고 경우에 따라 필요한 지연(遲延)전략을 구사할 수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법률 전문가들은 폭증하는 소송수요나 사회적 법률비용을 감안할 때 ADR를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다. 태평양법무법인 한이봉(韓利奉)변호사는 “사회가 갈수록 고도화 전문화되는 반면 법관들이 쏟아지는 전문지식을 따라가기 어려워져 판결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ADR는 새로운 ‘리걸 스탠더드’가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특별취재팀〓황호택(기획팀장) 고미석(기획팀) 박래정(정보산업부) 홍석민(〃) 신치영(경제부) 이희성(국제부) 김갑식(문화부) 정성희(사회부) 최영훈(〃) 이성주(생활부기자)

▽법률자문 및 자료 도움〓법무법인 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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