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신윤환/머나먼 「동티모르의 봄」

  • 입력 1999년 9월 8일 19시 24분


동티모르가 제2의 ‘킬링 필드’로 변할 위험에 처해 있다. 유엔 감시하의 주민투표에서 80% 가까운 투표자가 독립을 선택한 개표결과가 나오자 반독립파 민병대는 독립을 지지한 마을 주민들을 집단 학살하는가 하면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 공포에 질린 동티모르인들은 밀림 성당 학교 유엔감시단 건물로 피신하고 있다. 국경을 건너 인근 인도네시아령 서티모르와 인근 도서로 탈출한 사람만도 5만명에 이른다. 지금까지 민병대의 총칼에 생명을 빼앗긴 사람만도 1000명을 넘어섰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인구 85만에 불과한 인도네시아 남서쪽 외딴 섬 동티모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이다.

동티모르는 75년 400년에 걸친 포르투갈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했지만 독립파 반독립파 인도네시아통합파 등 갈래갈래 찢긴 정치 세력간의 반목과 갈등으로 내전에 휩싸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인도네시아 군부는 동티모르를 침공 점령했다. 이듬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했다. 독립을 열망하는 동티모르인들의 저항은 끈질겼지만 인도네시아 주둔군의 탄압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적게는 10만명, 많게는 총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이 게릴라가 아닌 양민들이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동티모르인들의 무력투쟁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개발프로그램과 군부의 소탕작전 앞에 자취를 감추는 듯 했다. 그러나 91년 독립투사 추모미사를 끝내고 나오던 딜리 시민들을 향해 인도네시아군이 총탄세례를 퍼부어 100여명의 사망자를 낸 이른바 딜리사건이 터지면서 인도네시아 정부가 벌인 통합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젊은 세대에 동티모르의 역사를 다시 깨우치게 하고 독립의욕을 고취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94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이 자카르타에서 개최되는 기회를 이용해 동티모르 출신 대학생 29명이 미대사관으로 뛰어들어 농성을 벌여 동티모르 문제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다. 그 후 수백명의 학생들이 외국공관을 통해 서방 각국에 망명한 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각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은 동티모르출신 가톨릭 주교 카를로스 벨로와 티모르독립혁명전선(프레틸린) 지도자 주제 라모스오르타가 96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는 결실로 나타났다. 동티모르인들의 끈질긴 투쟁과 이를 지지하는 국제여론의 형성은 결국 인도네시아 하비비정부로 하여금 주민투표 실시를 수락하게 만든 것이다.

무려 90%의 동티모르인들이 반독립파의 협박과 테러의 위험 속에서 주민투표에 참가하고 이 중 79.5%가 독립에 찬성했지만 동티모르의 독립 여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독립을 반대한 동티모르인은 인도네시아 정부 아래서 관료생활을 했거나 각종 특혜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살육전에 앞장선 반독립파 민병대들도 인도네시아 주둔군이 독립게릴라들을 진압하기 위해 조직한 불량배로 구성돼 있다. 각종 만행을 저질렀던 이들에게 독립은 보복과 죽음을 의미한다.

7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치안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동티모르 침공의 주역이요 학살의 주범이자 민병대의 후견인인 인도네시아 군부가 중립을 지킬지 의심스럽다. 그렇게 믿는 동티모르인들도 없다. 이번 사건의 와중에도 인도네시아 군인들은 민병대원들의 만행을 방조하거나 직접 학살과 테러를 저지르고 있다. 곧 투입될 계엄군이 독립지지 동티모르인들을 외부로 몰아 내고 반독립파만 남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루머까지 나돌고 있다. 심지어 44년 만에 실시된 자유총선거에서 승리해 강력한 대통령후보로 떠오른 메가와티 인도네시아민주투쟁당 당수조차도 동티모르의 독립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동티모르문제는 인도네시아의 개입이나 간섭이 배제될 때만이 공정하고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사태는 막연한 낙관론 속에서 아무런 사후대책 없이 주민투표를 조급하게 준비하고 실시한 유엔에도 큰 책임이 있다. 때가 늦었지만 유엔은 지금이라도 무장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폭력을 종식시키고 평온 속에서 독립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신윤환(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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