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그래도 청문회는 열려야

  • 입력 1999년 8월 30일 19시 16분


옷로비 의혹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사건 청문회가 소문만 요란하고 먹잘 것 없는 잔치로 끝남으로써 청문회 무용론이 힘을 얻고 있다. 두 사건은 애초부터 국회 청문회로 다룰 사안이 아니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긴 그렇다. 하나뿐인 진실을 두고 서로 다른 말과 말이 맞서는 판국에 수사관도 아닌 국회의원들이 무슨 수로 진상을 밝혀내겠는가.

하지만 청문회를 한 것이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본다. 진상규명이라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여러 가지 ‘좋은 부작용’을 남겼기 때문이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을 이 ‘좋은 부작용’을 꼼꼼이 살펴 보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청문회는 왜 특별검사제가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보여줬다. 두 사건 수사를 담당한 경찰 사직동팀과 검찰 수사팀은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능력이 없어 그런 엉성한 수사결과를 내놓았겠는가. 경찰과 검찰은 그 자체가 권력기관이며 그 상층부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의 지배자들과 지연 학연 혈연 등 연고관계를 통해 종횡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 이번 청문회에서 새삼 확인됐다. 권력자와 그 가족이 연루된 불법행위를 경찰과 검찰이 엄정하게 수사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유권무죄와 유전무죄로 표현되는 법집행의 불공정성에 대한 국민 불신을 해소하는 길은 특검제밖에 없다.

둘째, 청문회는 대한민국 상류사회의 문화풍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봉사활동’을 하는 틈틈이 특급호텔과 내로라 하는 디자이너들의 옷가게, 유명 가수의 디너쇼를 순례하는 ‘뒤로 호박씨 까기’는 고관부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소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던 국회의원들이 청문회에서만은 국가적 난국을 들먹이며 증인들에게 도덕 강의를 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는데, 정말로 떳떳이 그런 설교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지 모를 일이다. 국민은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나으리와 사모님들도 지위와 돈의 거품을 걷어내고 보면 별 것 아니다. 말끝마다 국익과 공익을 내세우는 번듯한 말씀 앞에 주눅 들지 말고 목소리 높이고 싸워서라도 자기 권리 철저히 챙겨야 한다.

셋째, 청문회는 유권자들에게 정치적 판단의 기회를 제공했다. 말로는 진실 규명을 외치면서도 발언을 할 때마다 자기의 지역구를 소개하느라 귀한 시간을 까먹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0분, 20분씩 기계적으로 끊어버리는 벽창호 같은 의사진행은 여야 간사들의 책임이라고 하자. 하지만 사태의 핵심에 잘 접근하는 동료의원을 위해 단 5분이라도 자기 시간을 잘라주는 도량을 발휘하는 의원을 찾아 볼 수 없었던 건 정말 슬픈 일이다. 과녁을 빗나가는 질문과 남이 한 질문을 되풀이하면서도 할당된 ‘텔레비전 출연시간’만은 남김없이 찾아먹은 의원들도 유권자들은 꼭 찍어두시기 바란다. 자기의 무능을 드러내는 일에 이렇게 열심인 분들은 내년 선거에서 떨어뜨리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바람직하다.

한국 청문회를 미국이나 유럽의 의회 청문회와 비교하면서 자학할 필요 없다. 반쪽짜리나마 민주주의를 시작한 것이 이제 10년을 겨우 넘었다. 한 술 밥에 배부를 리 없고, 무슨 일이든 자꾸 해 봐야 느는 법 아닌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청문회는 살려 놓아야 한다.

유시민(시사평론가) s2smrhyu@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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