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육정수/正義는 휴가중이었다

  • 입력 1999년 8월 17일 19시 19분


프랑스의 판검사들에겐 유별난 관행이 있다. 이름하여 ‘사법(司法)의 바캉스’. 매년 7월15일부터 9월15일까지 바캉스기간에는 재판을 진행하지 않는 전통이다. 긴급사건이 있을 때는 한때 ‘바캉스 법정’으로 불렸던 약식법정이 대신한다.

바캉스(vacance)는 ‘공백’을 뜻하는 영어의 베이컨시(vacancy)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사법의 공백’을 인정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국가의 법집행 업무에 공백이 생겨서는 곤란하다는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마침내 1974년 ‘사법의 상설성(常設性)과 계속성은 항상 지켜져야 한다’는 법규정이 마련돼 ‘사법의 바캉스’는 공식 폐지됐다. 하지만 판검사들은 큰 변화없이 지금도 ‘사법의 바캉스’를 즐긴다고 한다.

◇검찰수사 원칙잃어

우리나라 판검사들에게도 비슷한 관행이 있다. 판사들은 7월 하순에서 8월 초순까지 재판일정을 거의 잡지 않는다. 이것이 재판을 장기화하는 요인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법의 바캉스’보다는 ‘정의(正義)의 바캉스’가 문제다. ‘사법의 바캉스’에 대한 비판은 정의가 한시라도 잠을 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다.

검찰은 이번 여름 바캉스기간을 유난히 뜨겁게 보냈다. 경기은행로비사건 파업유도의혹사건을 수사하랴, 세풍(稅風)수사와 관련한 계좌추적으로 코너에 몰리랴,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 차남 현철(賢哲)씨의 재수감 여부를 놓고 고민하랴. 검찰로서는 ‘사법의 바캉스’가 그림의 떡이었다. 형식상 사법의 공백은 없었던 셈이다.

문제는 내용이다. 이는 검찰이 왜 존재하는가 하는 본질적 문제와 직결된다. 경기은행사건과 파업유도사건 수사는 검찰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도마뱀 꼬리 자르기’라는 의혹을 남겼다. 그 와중에 박순용(朴舜用)검찰총장은 ‘원칙과 기본이 바로 선 검찰’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이에 대해 ‘혹시나’하는 일말의 기대는 며칠 못가 ‘역시나’로 바뀌었다. 또 속게 된 백성들은 이제 체념상태다. 91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야당의 후원회계좌를 마구 뒤진 행태는 검찰이 말하는 원칙과 기본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김현철씨 문제를 다루는 검찰의 자세는 더욱 한심했다. 과연 이 나라에 검찰이 있는지, 사법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게 한다.

실형이 확정된 불구속피고인은 단 하루라도 수감하는 게 당연하다. 이는 어떤 타협이나 정치적 고려가 있을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원칙이다. 검찰은 어떠했는가. 미적미적→뒤늦게 소환장 발부→김씨 출두거부→어물어물→김씨 사면확정→재수감 포기, 이렇게 20일을 보냈다. 징역 2년 중 6개월밖에 살지 않고 잔형을 면제받은 사면내용도 문제지만 단 하루의 정의도 세우지 못한 검찰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자신의 못남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껍데기인 사법은 있으되 알맹이 정의가 없는 상황. 이번 여름을 날씨보다 더 무덥게 한 것이 검찰이다. 태풍 ‘올가’보다 국민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준 것이 검찰이다. 법이란 역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인가. 검찰의 ‘원칙과 기본’은 행방불명이다.

검찰의 임무는 한마디로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언필칭 국민의 검찰이라면 국민의 정의관념을 존중해야 한다. 이번 여름에 보여준 검찰의 자세는 ‘국민의 정부’라는 간판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검찰은 역시 한계가 있음을 만천하에 고한 셈이다.

◇국민들 가슴앓이

역사는 검찰이 국민보다 늘 권력자 편이었음을 보여준다. 검찰제도는 14세기 프랑스의 ‘왕의 대관(代官)’제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처음에는 왕의 사익(私益)보호, 즉 왕권을 수호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다가 16세기 절대군주제와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계기로 우여곡절을 겪은뒤 19세기 들어 오늘날과 비슷한 제도가 갖춰졌다. 이것이 독일과 일제(日帝)를 거쳐 우리에게 도입됐다.

그렇다면 왕권에 충성하던 ‘유전자(遺傳子)’가 우리 검찰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건가. 검찰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하기는 검찰도 답답할 것이다.

육정수〈논설위원〉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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