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일수/김현철씨 사면 아직 이르다

  • 입력 1999년 7월 29일 18시 38분


해마다 8·15광복절이 오면 담 안에 갇혀 있던 수형자들이 특사나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올해도 양심수라 불리는 많은 시국공안사범은 물론 선거사범을 비롯한 일반 형사범들이 상당수 풀려날 전망이다.

8월15일이 우리에게 무슨 뜻이 있는가. 어둠에서 광명으로라는 의미로 우리는 광복을 말한다. 또한 질곡에서 자유로라는 의미에서 해방을 말한다. 빛을 되찾고, 노예상태에서 자유로운 몸이 된 이날에 음지에 갇혀 있던 양심수와 그밖의 죄수들을 풀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는 일은 너무도 이 절기의 의미에 들어 맞는다.

이번 8·15특사에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아들 현철(賢哲)씨가 포함되는지에 관해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현철씨는 지금까지 범죄사실을 부인하며 대법원을 오르내리던 중 26일 재상고를 취하해 고등법원의 유죄판결을 확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환란에 관한 국회청문회에 불참해 약식기소된 사건에 대해서도 정식 재판청구를 취하했다. 이 사실을 놓고 김현철 특사를 통한 신구정권 대화합이라는 모종의 빅딜이 물밑에서 상당히 진행된 게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그 추측이 현실로 확증되는 날, 국민은 광복과 해방의 기쁨보다 말할 수 없는 수치와 의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온 나라의 뜻깊은 명절인 광복절과 김현철사면은 도무지 의미의 가교가 이루어질 수 없다. 광복절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김현철씨 사면은 때가 이르다. 그가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나라에 바치겠다고 약속한 70억원의 돈을 내놓아 사회에 속죄를 구하고, 권력에 기생해 국정을 농단한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일에 대해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자리에 이른 어느해 성탄절쯤이라야 사면이든 복권이든 국민정서에 맞을 것이다.

사면제도는 형사사법에서 몇가지 유용한 목적을 갖는다. 가혹한 죄형 규정의 사후적인 완화라든지, 입법 또는 사법의 결함에 대한 구제라든지, 판결의 오류에 대한 수정이라든지, 재사회화 인간화라는 형사정책 목표의 달성 따위가 그것이다. 국민의 정부 출범 직전부터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국민대화합 또는 그밖의 정치적 고려 때문에 사면을 자주 단행했다. 제15대 대통령선거 직후 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의 합의 아래 단행된 12·12, 5·18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특별사면은 위에서 언급한 사법정의의 실질적 수행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에 의해 사면권이 남용된 예다. 이로 인해 법을 통한 과거 청산과 새로운 법치문화의 창달을 기대했던 소박한 국민의 법감정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사면은 국가원수의 특전 내지 은전의 성격을 분명히 갖는다. 사면을 통해 형선고의 효과 또는 소추권이 소멸된다. 평화로운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데 에누리 없는 형벌집행이나 가차없는 소추권 행사만이 능사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미 구체화된 형벌권을 신축성 있게 활용하는 것이 법이념 법가치의 실현에 더 적합할 수도 있고 법질서 내부의 긴장을 완화시켜 줄 수도 있다.

유명한 법철학자 라드 부루흐는 이렇게 말했다. “사면은 법 밖의 세계에서 비쳐들어와 법세계의 추운 암흑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밝은 광선이며 기적이 자연계의 법칙을 깨뜨리듯이 법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법칙 없는 기적이다.” 사면은 법의 경직성이 가져올 사랑 없는 정의, 즉 폭력화한 정의를 녹일 수 있는 사랑의 법이며 절망 속에 방황하는 수형자의 앞길을 인도하는 한줄기 희망의 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면권은 사법권의 실현에 의한 법적 안정성을 행정작용에 의해 수정하는 것이므로 예외적인 최후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사법권이 스스로의 결정을 번복해야 시대의 요청에 맞을 여건에서도 스스로를 거부할 수 없는 자기논리의 곤궁에 빠져있을 때 사면은 사법의 진정한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겸손히 투입되는 것이다.

시대의 요청을 결정하는 힘은 국민의 법감정이다. 국민의 공감대 없이 정치적 계산 때문에 사면권을 남용하면 국민의 건전한 법감정을 손상시키고 법의 권위도 훼손시킨다. 김현철 사면은 아직 때가 이르다.

김일수(고려대 교수·경실련 상집위원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