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48)

  • 입력 1999년 6월 21일 19시 32분


볼따구에 살두 봉봉히 붙구 눈매가 아주 부드러워졌는데. 너 무슨…연애 같은 거 하냐?

쓸데없는 소리 집어쳐.

하고 그를 윽박질러서 입을 막았지만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환쟁이들은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게 버릇인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갈뫼에서의 나날을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애를 썼다.

걔두 한 고비 넘겼지.

누구 말야?

호선이. 한동안 안절부절을 못해서 나까지 불안했다. 망명하기루 결정을 했다나? 난 말리지 않았어. 그 대머리 목사님이 여러가지루 분주하더라만.

그의 말을 듣고보니 제 삼국에의 밀항이니 망명이니 하던 호선의 얘기가 근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 목사가 유럽 어느 나라의 외교관과 친했다는데 그가 주선을 해서 일단 대사관 구내에 피신을 시키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대사관의 로비에 당도했고 현 목사가 지금 엘리베이터에 오르기만 하면 끝난다며 호선의 등을 떼밀었다. 대사관측의 제안에 의하면 거기서 지내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제 나라 국적의 배가 들어올 때 대사관 차로 호송해서 태워 주겠다는 것이었다.

막상 혼자 들어가려고 하니까 생각이 복잡하더래.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을 달라구 그랬다지.

호선이는 담배 한 대를 피우는 짬에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벗들이 죽어간 땅에서 떠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명치 끝이 찌릿할 정도로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회한과도 같은 씁쓸한 심사가 되어 나는 혼잣말 비슷이 말했다.

그래 나두 다시 시작하겠어. 일할 친구들을 모아 봐야지.

우리는 점심 먹고나서 갈데없이 명헌의 화실로 돌아갔고 그도 나 때문에 작업은 못하고 이러쿵 저러쿵 그 동안 못만난 친구들의 얘기를 하면서 오후를 보냈다. 나는 어쨌든 집에 잠깐이라도 들러 보려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명헌은 평소에도 무슨 독재라든가 민주화라든가 외세라든가 자주라든가 자본이니 혁명이니 하는 따위의 낱말만 나와도 진절머리를 냈지만, 쫓기는 사람은 도와 줘야 한다든가 예술가는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거나 양민을 학살한 자는 반대해야 한다는 생각엔 분명하게 동의를 했다. 그는 때마침 일어나기 시작한 그림에서의 현실의 반영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우리 친구들이 퇴폐적이라고 하는 모던아트 계열이었다. 놀기 좋아하는 그를 마음 편히 놀지도 못하게 만든 세상은 일단 내가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편이 되어 주기로 했다. 듣고보니 호선이와 명헌은 평소에 광주 같은 고장에서 만났다면 서로 개새끼라고 욕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 혈육같이 되어 있었다.

그 반지는 웬거냐?

눈이 날카로운 그가 불쑥 물었고 나는 얼결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대답했다.

비상금으로 끼구 다닌다.

니 후원자가 준 거냐?

나는 그저 웃기만 하는데 다시 그가 말했다.

약혼했냐?

허 그놈 참…궁금한게 뭐 그리 많어. 나 결혼했다. 식은 못 올렸지만.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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