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파이어니어]19세 첼리스트 다니엘 리

  • 입력 1999년 5월 25일 18시 39분


지난해 11월21일 미국 뉴욕 링컨센터의 앨리스 털리 홀. 젊은 첼리스트가 활달하게 그어대는 선율에도 취한듯 객석에서는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뉴욕 실내교향악단이 쇼스타코비치 첼로협주곡 끝부분의 강한 당김음을 쿵쿵 찍어댔다. 첼리스트는 결승점에 다가가듯 크게 몸을 틀더니, 활을 움직여 마지막 음표를 공간에 흩뿌렸다.

“브라보!” 환성이 터졌다. 청중은 환호를 그치지 않고 독주자를 거듭 무대에 불러냈다. 갓 18세에 불과한 첼리스트 다니엘 리의 뉴욕 데뷔공연이었다.

“다니엘 리의 악보해석은 성숙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첫마디부터 긴장과 사색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 나갔다. 그의 소리는 강하고 풍요로왔다.…”

다음날 아침 뉴욕타임즈 음악면 톱기사로 실린 공연평. 엄격한 평으로 이름난 뉴욕타임즈가 단 하나의 불만도 없이 찬사로 일관된 리뷰를 실은 것이다.

다니엘 리. 한국이름 이상화(李相和). 아직 소년티가 채 가시지 않은 커티스음대 재학생. 음악팬들은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세계 굴지의 음반사인 데카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있었고, 현존 최고의 첼로대가인 로스트로포비치의 수제자였다.

13년을 거슬러 올라가 85년 미국 시애틀. 다섯살의 다니엘은 잠시도 쉬지 않고 부산하게 뛰어노는 아이였다. 유치원에선 선생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어댔다.

“똑똑한 아이라서 그렇죠. 얜 뭔가 될 거예요.”

선생님은 엄마를 안심시켰지만 엄마는 다니엘에게 차분함과 집중력을 가르치고 싶었다. 미국에 이민온 지 갓 8년. 기반을 잡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모자라 항상 미안했다. 엄마대신 마음을 가라앉혀 줄 뭔가가 필요했다. ‘피아노를 치게 하자.’

다니엘은 한 두 번 교습을 받고 온 뒤 모든 건반의 음높이를 기억했다. 어느날 옆교실에서 첼로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저걸 할래.”

하루 건너 피아노와 첼로를 하면서도 지루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첼로 기량도 쑥쑥 향상됐다. 열살 때 처음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1년이 지난 뒤 미국 중견악단인 시애틀교향악단과 협연을 했다. 협연은 대성공이었다.아들을 프로연주가로 나서게 하느냐는 문제로 엄마가 망설이고 있을 때 결정의 계기가 왔다. 그와 협연한 시애틀 교향악단의 단원이었다.

“이런 아이를 도와주지 않으면 벌받을 것만 같아 말씀드리는 건데요, 제가 다니엘을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소개할게요.”

첼로거장과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91년 워싱턴에 있는 로스트로포비치의 방. 거장은 다니엘의 연주를 몇 분 듣더니 그 자리에서 말했다.

“너를 특별하게 키워주마. 이제는 제자를 받지 않으려 했는데, 너는 예외로 해야겠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니엘은 아직 열한 살. 일가족이 시애틀에 마련해두었던 기반을 훌훌 털고 필라델피아로 이주했다.

커티스 음대를 다니면서 로스트로포비치의 레슨을 받는 생활이 계속됐다.

“3년 동안은 연습만 하거라”하던 로스트로포비치는 3년뒤 세계 정상급 악단의 하나인 클리블랜드관현악단과 협연을 허락했다.

이듬해인 15세 때 위그모어홀에서 열린 런던 데뷔연주. 객석에는 음반사 데카의 프로듀서가 있었다. 며칠 뒤 필라델피아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데카 부사장인데요,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와 함께 찾아가겠습니다.”

집으로 찾아온 두 사람 앞에서 다니엘은 바흐와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좋습니다. 당장 계약하지요. 올해부터 전속금을 입금하겠습니다. 녹음은 언제든지, 다니엘이 준비됐다고 생각할 때 하죠.”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다니엘이 일찍 세상에 나와 연습할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되, 다른 음반사와 계약을 맺지 않도록 하자는것. 그만큼 이 어린 연주가의‘미래’를 신뢰한다는뜻이었다.

그리고 다시3년.약속됐던것 처럼 그는 작년 ‘세상 속으로’ 나왔다. 뉴욕연주의 성황에 이어 슈베르트‘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등을 담은 데뷔음반도높은 평가를 받았다.

“나이답지 않은 웅혼(雄渾)함과 깊이를 느끼게 한다. 자유로우면서도 방만하다기 보다는 확고한 음악의 ‘뼈대’를 보여준다.”

그의 음반에 대해 음악계가 보여준 찬사다.

세계 최고의 예술기획사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CAMI)가 일정을 관리하는, 데카레코드 전속 첼리스트. 내년 커티스음대를 졸업하는 다니엘의 현주소다. 탄탄대로가 눈 앞에 열려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신중하다. 자신을 ‘천재’로 부르는 것도 경계한다.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은 연주란 끊임없이 정진해야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앞으로 음반도 계속 발매될 것이고, 고국 팬들을 만날 기회도 많아지겠죠. 그렇지만 저는 계속 연주하고 연구할 뿐입니다. 아직까지 탐색해보지 못한 음악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데요.”

▼다니엘 리 약력▼

▽생년월일〓1980년 1월 11일

▽학력〓2000년 커티스 음대 졸업예정

▽가족관계〓필라델피아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이성명씨와 이경숙씨 사이의 외동아들

▽살면서 감동받은 일〓작년 고향 시애틀에서 독주회를 마쳤을 때 어린시절의 유치원 선생님이 사진첩을 들고 찾아와 축하해준 일

▽좌우명〓인내는 어려움을 딛고 최후의 승리를 약속하게 하는 무기

▽사용하는 악기〓1725년 제작된 이탈리아산 카를로 토니니

▽스승〓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올랜도 콜

▽취미〓태권도 낚시 그림그리기

▽좋아하는 음악〓항상 그때 연습 중이거나 연주 중인 작품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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