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빗나간 벤처육성]서류만 갖추면 벤처등록

  • 입력 1999년 5월 18일 19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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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기업의 신규채용이 거의 중단되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량 실직사태가 빚어지면서 고학력 실직자와 대학생 연구원 등이 너도나도 벤처기업 창업에 눈을 돌렸다.

특히 정부가 지난해 5월부터 벤처기업육성특별법에 정한 요건을 갖춘 중소업체에 ‘벤처기업확인서’를 발급하고 정책자금우선지원 등 각종 혜택을 주면서 벤처기업 창업이 붐을 이뤘다.

4월까지 정부가 인정한 벤처기업은 2천9백1개. 이중 IMF사태 이후 창업한 신생업체는 3백36개(11.6%)에 불과하고 창업 7년이 넘는 업체가 절반 가까이나 된다.

이처럼 신생업체는 물론 기존 중소업체까지 벤처기업으로 지정받기 위해 안달이다 보니 ‘벤처 신드롬’에 편승한 갖가지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다.》

벤처는 만사 OK?〓정보서비스업체인 서울 송파구의 K사. 지난해 8월과 10월 두차례에 걸쳐 벤처기업 확인서를 받았다. 처음에는 연구개발비가 매출액의 5%이상인 요건을 충족, 벤처확인서를 받았지만 영업사원들이 “장사를 하려면 특허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특허권으로 다시 확인서를 받은 것.

벤처확인서를 가진 업체는 중소기업청의 창업자금을 비롯,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우선적으로 정책자금을 지원받는다. 또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받고 세금 감면 조치와 함께 병역특례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기존의 중소기업체가 벤처기업 지정을 받기 위해 나서고 있다. 기술신용보증기금 경기기술평가센터 김정항(金正恒)과장은 “벤처확인서를 가진 업체중에는 빚만 잔뜩 진 부실 중소기업이나 구멍가게 수준의 간판만 있는 업체도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갖가지 편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난해 6월 창업해 영상반주기 카드를 개발중인 경기도의 T사. 직원의 병역특혜를 위해 평소 안면이 있는 모 대학 공대교수에게 9백만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벤처기업확인서를 받았다.

지난해 사상 유례없이 8백32개의 민간연구소가 세워진 것도 벤처기업 요건을 맞추기 위해 급조된 것이 많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벤처창업 열기에 편승, 정부확인서를 받게 해준뒤 리베이트를 챙기는 브로커들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벤처창업에서부터 정부확인서 발급, 대출담보 제공, 사업수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대행해주는 이른바 ‘토털서비스’를 제공한다.

창업을 준비 중이거나 창업초기에 있는 서울 관악구의 창업보육센터 입주자들은 최근 브로커들로부터 “벤처기업으로 등록시켜 각종 대출금을 받아주겠다”는 유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착수금 1백만∼5백만원, 대출금의 20% 리베이트’라는 조건이 붙어있다.

명문대 출신의 벤처브로커 P씨(32)는 “부도위기에 몰린 회사도 창업투자회사와 연결해 가짜 투자서류를 꾸민 뒤 벤처기업 지정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벤처지정을 받은 업체가 정책자금을 허위 집행하고 있는 사례도 많다. 허위영수증으로 사업진도 보고서를 내는 것은 예사고 지원기관의 현장조사가 나올 때면 주변에서 빌려온 장비를 자신들의 장비인 것 처럼 속이기도 한다.

영상관련 벤처기업가 C씨(32)는 “다른 회사의 요청에 따라 한달에 여러차례씩 영상편집기를 빌려주고 있다”고 털어놨다.

벤처신드롬의 문제점〓이처럼 정부의 벤처지원정책에 편승한 갖가지 편법들이 난무하는 것은 정부가 제시하는 기준에 맞춰 서류만 구비하면 별다른 심사나 확인절차 없이 벤처기업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일단 벤처기업으로 지정된 업체는 2년간 자격을 유지한다.

서울중기청 관계자는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서류심사만을 통해 14일내에 벤처기업 확인서를 발급해준다”며 “사실상 현장실사나 중간점검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털어 놓았다.

각종 정책자금을 타낸 업체들에 대한 정부의 중간점검이 소홀한 것도 문제다. 특히 중소기업진흥공단이 1월 창업자금 지원업체에 대해 실시한 현장조사에서 중점적으로 체크한 사항은 향후 2001년까지 추가 고용계획이 얼마나 되는지 여부였다. 설비구입 등 자금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여부보다는 실업대책의 효과를 점검하는 데 그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2002년까지 벤처기업 2만개 육성’을 목표로 신생기업은 물론 대학창업동아리 등 예비창업자에게도 그 폭을 넓힐 계획이다.

벤처기업 숫자늘리기의 정책기조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 올해 목표는 3천개. 2천개를 신규 창업하고 기존 중소업체 1천개를 벤처기업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의 벤처정책이 실업대책 등과 맞물려 있어 미국식 벤처모델을 기준으로 바라봐서는 곤란하다”며 “벤처산업의 씨를 뿌리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정책대안〓하지만 정부의 이같은 양적 팽창정책과 전시적 자금지원이 벤처기업의 창의성과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연세대 정승화(鄭昇和·경영학)교수는 “법으로 벤처기업을 정하는 것도,정부가 직접 돈을 뿌려 지원하는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원평가기준에 질적인 요소를 포함시켜 보완하고 중간 및 사후점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벤처연구소 한정화(韓正和·한양대교수)소장은 “벤처기업에 대한 개념의 혼란을 막기 위해 첨단벤처와 일반벤처로 구분, 지원을 차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벤처컨설턴트 유효상(柳孝相)인터벤처사장은 “무작정 벤처기업의 숫자를 늘리기보다는 가능성 있는 업체를 엄선, 사후 과정을 정밀 평가해 지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창업투자회사나 공공벤처펀드 등 벤처캐피털의 육성과 코스닥(KOSDAQ·장외시장)의 활성화 등 사회경제적 인프라 구축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 특별취재팀 ▼

오명철팀장 이병기 이철희 박현진 윤종구 부형권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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