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의 심리학]심영섭/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 입력 1999년 5월 9일 19시 07분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사나이가 경찰서 책상밑에 엎드려 있다.

갑자기 베트남전쟁중 적진에서 고문을 당하던 장면이 사나이의 머리속을 휙휙 지나가고, 일순간 그는 경찰서를 뛰쳐나간다. 자신이 발딛고 있는 미국땅을 베트남 정글로 착각하고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한다.영화 ‘람보1’의 한 장면이다.

정부를 상대로 무지막지한 싸움을 벌였던 액션 영웅 람보의 생생한 공포는 어디서 오는 걸까? 람보가 베트남전과 현실을 혼동하면서 겪는 혼란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Syndrome)의 일종이다.

이 장애는 흔히 전쟁 교통사고 고문 강간 등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어낸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그들은 사건이 연상되는 일을 의식적으로 피하지만 꿈이나 회상을 통해 사건을 재경험하면 신체적 흥분과 심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국내에서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피해자들에게서 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적지않게 발견되었다. 당시 주차장에서 살아나온 피해자들이 다시는 운전을 하지 못하겠다거나 삼풍백화점 근처에도 가기 힘들다는 호소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의 집중력 저하나 불면, 과민반응 등을 보이는 외상후 스트레스 피해자들의 모습은 피터 위어 감독의 ‘공포 탈출’에도 잘 그려져 있다. 주인공 제프 브리지스는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친구를 잃고 혼자 살아남는다. 그는 밤마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악몽을 꾸고 이때문에 가정과 직장에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주인공은 고층빌딩 옥상에 올라서거나 과속으로 차를 돌진하는 등 공포와 직면하는 경험을 시도한다.

천하무적의 람보도 녹여내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그것은 극한의 상황을 견디어냈던 끈질긴 인간정신에 대한 일종의 훈장일 터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두고두고 남아있는 정신적 상처인 것이다.

심영섭(영화평론가·임상심리전문가)kss1966@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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