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향기]서정주「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 입력 1999년 4월 21일 21시 37분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서정주 시전집’(민음사)에서

미당 서정주의 시전집을 읽을 때마다 일부러 2백85쪽을 찾아서 다시 읽어보는 시다. 메마른 마음에 물 한동이를 쏟아붓는 듯한 신선한 느낌 때문이다.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저기에서 걸어오는 그 애. 한방울이라도 떨어뜨리면 나를 보지 않고 지나가버리는 그 애. 그러나… 그러나 한방울도 안엎질렀을 때 눈을 맞추고 웃는 그 애. 그 웃음. 아마도 그 애는 물 긷는 일에 사랑을 다 건 모양이다.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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