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93)

  • 입력 1999년 4월 18일 19시 52분


우리는 그것을 타자로 찍어서 팜플렛으로 만들어 각 그룹들에게 보급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고 기억된다.

활동가가 지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제까지 낯익은 자신과 주변을 일시에 끊고 얼굴없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에게는 이름도 없고 특징도 없다. 다만 그는 보편적인 민중이 가지고 있는 생계수단을 획득해야 한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취업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습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직업이 없는 자는 그 순간부터 생존의 방식을 상실한다. 그뿐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가 없다. 직업을 가지고 자신이 들어선 낯선 세상에서 될 수 있는 한 빠른 시일 안에 취약한 자기를 둘러싸 줄 이웃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로 통하는 모든 통신 수단을 단절한다. 전보, 편지, 인편은 물론 특히 전화는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도피자끼리의 연락이 불가피할 경우에는 양자가 반드시 연결할 대리인을 통해야 하며 그 대리인은 두 단계로 처리해야 한다. 연결을 맡은 대리인은 사전에 반드시 안전 점검을 해야 한다. 조직 중심은 외곽에서 도피자의 신변을 정기적으로 파악하며 기간 중에 어떠한 임무를 주거나 연결을 시도해서는 안된다.

도피자는 특히 도시의 중심가를 피해야 한다. 복장과 말투는 평범해야 한다. 도심지를 보행으로 이동하는 것은 좋지않다. 보도를 걸을 때에는 길의 안쪽으로 걷고 상가의 쇼윈도를 적절히 활용한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군중의 뒤에 서서 기다린다. 언제나 군중 가운데 있을 때에는 너무 빨리 또는 너무 늦게 움직이지 않는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때에는 가급적이면 장거리 여행을 하지 않는다. 긴 여정이라면 몇번에 나누어서 갈아탄다. 도심지에서 버스를 탈 경우에 안전 좌석은 운전석 뒤편 즉 차도로 향한 열의 문과 가까운 지점의 좌석에 앉는다. 보도쪽으로 있는 자리나 특히 창가의 자리는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된다. 이동은 되도록 야간에 실행하고 그 다음은 새벽이며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러시아워는 피해야 한다. 그 누군가가 자신을 발견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도록 미리 방비해야 할 것이다.

수칙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이런 말은 오랜 동안 뇌리에 남아 있었다.

도피자는 검거되지 않는 것이 그의 동료들에 대한 첫 번째의 의무이다. 도피자는 도피 그 자체가 가장 주요한 활동이다. 이를테면 그는 주위에 위험을 전파할 수 있는 전염병의 보균자와 같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격리하여 위험이 가실 때까지 자신과 싸워야만 한다.

단련, 도덕성, 헌신, 믿음, 용기… 온 몸을 옥죄는 그런 단어들이 문장의 틈새마다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지. 그건 마치 뜨겁게 달아오른 마른 혓바닥 너머로 솟아오르는 가쁜 숨결 같았다. 바위틈에서 콸콸거리며 쏟아져 내리는 차가운 물을 가슴 시리게 끝없이 마시고 싶도록 갈증으로 가득찬 문장들.

안양은 예전의 포도밭이 모두 사라지고 작은 가내공장들과 접대부가 득실거리는 술집들과 더러운 폐수가 검게 흘러가는 개천만 남아 있었다. 개천가에 무성해진 뱀 풀 덩굴조차 반가울 지경이었다. 이제는 그 언저리에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섰겠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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