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90)

  • 입력 1999년 4월 14일 19시 50분


동우는 내 뒤를 따라서 창문에 올라서면서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옷 좀 입구요.

나는 그 때 뒷집 담장을 발디딤으로 삼고서 이웃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뭘하는 거야. 부숴버려!

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구둣발로 판자문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동우는 뒷집 담장을 짚고 넘어갔다. 문짝이 와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웃집 지붕의 짙은 그늘 속에 납작 엎드렸다. 누군가 손전등을 창문 밖으로 비춰 보며 외쳤다.

저쪽 골목이야. 그리루 튀었어!

이놈들 수배자가 틀림없다구.

이리 저리 뛰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 칠 팔명은 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우리 방 안에서 책이며 옷가지며 잡동사니들을 뒤졌다. 두 사람이 남아 있다가 물건들을 챙겨가지고 떠난 것은 네 시쯤 되어서였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고 완전히 인적이 끊긴 것을 확인하고서야 지붕에서 골목 쪽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나는 달동네가 끝나는 소나무 숲을 바라보고 뛰었다. 그래도 가방을 챙긴게 다행이었다. 동네를 벗어나자 무너져내린 산등성이와 귀뚜라미 울음으로 가득찬 잡초 덤불이 나왔고 길도 없는 비탈을 허우적대며 기어 올라갔다. 초입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바지 가랑이에 걸리곤 하였다. 나는 더욱 안으로 들어가 소나무가 듬성듬성한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에 달려서인지 숨이 턱에 닿아 올랐고 이마와 목덜미에는 땀이 흥건했다. 언덕에 올라 앉으니 아래편에 산동네의 음울한 지붕들과 그 아래로 시가지의 불빛과 가로등이 내려다 보였다. 불 꺼진 빌딩 위로 글자는 알아 볼 수 없는 붉고 푸른 네온 불빛이 계속 껌벅이고 있는 것도 보였다. 쫓기는 자에게 서울은 먼 이국의 도시처럼 낯설었다. 내가 들어가 몸을 눕힐 한 평의 방도 없는 제각각의 집들이 어둠 속에 잔돌맹이들처럼 박혀 있었다. 내 숨소리가 고르게 평정을 되찾으면서 뒤늦게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숲 속에 가득차 있는 걸 깨달았다. 저 가을 날 새벽녘에 풀벌레들의 대합창 소리를 들으면서, 위험과 고통으로 가득찬 세계 속에서 이루어낸 미물들의 삶의 환희를 알아차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뒤에 십 수년 동안 독방에 있으면서 입추 하루 전이나 바로 그날 또는 하루 이틀 차이로 돌연히 들려오던 귀뚜리 소리에 나는 매번 검거 직전에서 벗어나 날이 새기를 기다리면서 산등성이에서 보냈던 새벽녘을 생각하곤 하였다.

동이 훤히 터 올 즈음에 나는 산등성이의 반대편을 돌아서 시가지로 진입했는데, 그곳은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버스로 서너 정거장은 될만한 거리여서 그리 불안하지는 않았다. 나는 약속 장소로 갔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 대학병원이 있는 부근의 한 성당 뒤뜰이 그곳이었다. 출입구가 세군데나 되고 모두가 서로 다른 방향의 번화가로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보아 두었던 장소였다. 성당의 뒤편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어서 그 자리에 앉으면 이쪽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성당 건물 주위를 한눈에 내다볼 수가 있었다. 내가 성당 입구로 들어가니 벌써 저쪽 숲 그늘에 앉았던 최동우가 나타나 나를 손짓했다. 나는 겨우 안심이 되었다. 혹시 그가 담을 넘어가서 다른 골목 길에서 잡히지 않았을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터였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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