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87)

  • 입력 1999년 4월 11일 20시 01분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잠깐 앉으시지요.

무슨 말을 물어 본다고 허요?

나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물었다.

제가 떠나고 나서 이듬해에 한 선생이 여기서… 출산을 했다면서요?

으휴, 그랑께 그 소리가 은제나 나오나 조마조마하고 있었어라우. 여그는 조산원도 없응께 나가 받어냈지라. 지집아가 아조 귀인있이 생긴 거이 즈 에미를 똑 탁했더먼. 해마다는 아니어도 걸러서 한번씩 여름방학에 여기 덱고 왔는디 즈이 엄마 독일 가있을 적에는 못 보다가 삼년 전에 왔을 때 보니께 몰라보게 컸더만. 아주 큰애기 꼴이 나 갖고 키도 즈이 엄마만큼 컸더라니께.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희 누님두 아무 말씀이 없으셨구요.

나도 그런중 알고 남우 일인께 입 다물고 있었고만이라. 말을 허자면… 어디까지나 호적상 시집 안간 처년디 한 선생이 을매나 속을 끓였으까 잉. 아매 즈그 집 식구들만 알고 쉬쉬했을 거인디.

제가… 못난 사람입니다.

오 선생 처지가 그렇게 되아부렀는디 어쩔 것이오. 우리 교감 선생님 말씀 맨치로 다아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지라.

그러면 지금 그 애는 할머니하구 같이 사나요?

아녀, 즈그 동상되는 이 앞으로 호적에 올렸는 갑디다.

한정희씨 말인가요?

아매 그럴거여.

나는 정희를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윤희에게서 여러번 들어서 인상이며 성격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이가 서울서 무슨 치과병원 하구 있다는 소릴 들었는디. 남편하구 같이 의사 한다든가 뭐. 내 어디 주소하고 전화번홀 적어 뒀을거요. 야중에 찾어다 갈쳐 드리까라우?

예, 천천히 하십시오.

에이그, 난 그만 가봐야 쓰겄구마.

순천댁이 마루에서 일어나 울타리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은결이가 팔십이년생이라면 지금은 열여덟 살 먹은 처녀가 되었겠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을줄 알았던 이 세상에 윤희는 그 아이를 남겼다. 나는 갑자기 조바심이 나서 곧 아래로 내려가 전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은결이가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윤희는 우리들의 딸에게 아빠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남겼을까. 어쩌면 아이를 만나서는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타는 듯했다. 나는 윤희가 어째서 저렇게 자기 아버지의 젊은 날에 대하여 자세히 적어 두고 기억을 되새겼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윤희는 은결이와 내가 이승에서 지어갈 부녀지간의 애증을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최동우와 나는 팔십년 가을까지 달동네에 얻은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가끔씩 건이가 찾아와서 주변 상황을 전해 주었다. 석준이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일본 유학을 떠났고 조원들의 관리를 건이 혼자 해내느라고 좀 벅찬듯했다.

인자 이 동네도 끝이오. 샅샅이 뒤진다는구마.

어디 갈 데가 없잖아. 수배자 찾는다고 반상회 강화했지, 한강만 건너가도 검문 검색이지, 절까지 뒤진다는데.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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