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9)

  • 입력 1999년 1월 10일 19시 33분


사진에서 그네는 웃지 않는다. 나와 함께 이십년 가까이 갇혀 있었던 이 작은 물건은 화학반응을 일으켜 노랗게 되었다. 그렇지만 곱슬머리 때문에 끝만 약간 지진듯한 생머리를 양쪽으로 늘어뜨린 머리카락도 아직 선명하다. 동그란 이마, 속 쌍꺼풀 진 긴 눈, 광대뼈,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야무지고 사려 깊은 인상은 그대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오랜만이오… 라고 속삭였다. 한 십년쯤 전에 편지가 몇번 오고나서 이감을 가며 소식이 끊겼다. 그 편지들도 없어졌다. 직계 가족 외에는 면회도 안되고 편지도 안부 외에는 안되고 더구나 그냥 친지의 것은 열람한 뒤에 다시 반납하게 되어 있었으니까. 아마 이 사진은 체포될 때의 것이라 지갑 속에 든채 그냥 영치되었을 것이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모포 반납이나 또는 겨울 옷가지를 찾으러 영치품 창고에 가본 적이 있어서 이 사진이 잠들어 있던 곳을 잘 아는 셈이다. 구멍 뚫린 알루미늄 패널이 책장 같이 칸칸이 되어 있었고 거기 수인번호가 개표처럼 붙어있는 공간에 수감된 주인의 삶과 육신의 내음이 묻은 물건들이 분류되어 얹혀 있었다. 뒤축의 한 부분이 기우뚱하게 닳아버린 낡은 구두는 그 임자가 거쳐온 낯선 거리와 골목의 흙을 묻히고 있었지. 또는 막걸리 자국이 그대로 남은 물 빠진 작업복 상의와 안경집, 걸레처럼 삭아버린 여름 옷들, 망으로 된 한여름의 최신 유행 슬리퍼, 두툼한 등산화, 또는 각종의 모자들, 반지 목걸이 시계 따위의 장신구들, 그것들은 주인이 잡혔던 그 날의 시각에 정지된 채로 죽은 자의 추억처럼 노끈에 묶여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무렵에 그네의 편지를 베껴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감을 가면서 영치품과 신체검사를 당하고는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기억은 하고 있었지. 마지막 글줄이 어떻게 끝났던가.

―나는 당신을 갈뫼에서 언제나 만나요. 우린 거기서 아직도 살고 있어요.

아니 앞 문장과 뒷 문장의 순서가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네의 반명함판 사진을 예전처럼 어머니의 부적 뒤편에 집어넣고 지갑을 접었다.

삼촌 이제부터 서울입니다.

자동차가 줄지어 밀려서 가다가는 멈추곤 했는데 서울로 들어가는 톨게이트인 듯 했다. 나도 이 부근은 조직 문제로 남도의 각 지방으로 뛰어다니면서 고속버스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보다는 문이 좀 더 넓어졌다고나 할까. 거기서부터는 별수 없이 차들이 기어 가야만 했다.

올림픽 대로를 지나면서야 출근 차량들과는 반대 방향이어서 다시 차가 제 속도를 냈다. 여의도가 보인다. 빌딩의 작은 숲이 샛강 건너편에 생겨나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여름이면 날마다 뚝 넘어 멱 감으러 가던 귀신바위 웅덩이는 사라지고 바위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직 밖에 있을 때 양말산은 폭파되었다. 삘기를 뽑으러 갔던 갈대 숲도 땅콩 밭도 보이지 않았다. 아우와 고기를 잡으러 샛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뚝 위 행길가에 앉아서 노을에 빗긴 삼각산을 바라보던 생각이 났다.

분홍 빛에서 붉은 빛으로 그리고 보라색으로 차츰 변해가는 삼각산과 그 앞자락인 인왕산이며 북악이 어둠 속으로 잦아드는 광경을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아우가 배 고프다고 보챌 때까지 나는 뚝 가의 미지근해진 미군부대 송유관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떨 때에는 그 노을 속에 여의도의 비행장에서 떠오른 프로펠러 연습기들이 장난감 같이 반짝거리며 날아갔다.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