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20)

  • 입력 1998년 8월 10일 19시 27분


제1장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20)

차가 주유소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 아이는 전면에서 팔을 저어 인도하고 다른 아이들은 곤충을 분해하는 개미들같이 순식간에 자동차에 달라붙어 전면과 측면 유리들을 닦고 기름을 넣고 티슈와 면장갑, 사탕이 든 봉지 따위를 챙겨 넣어주었다. 일하기에는 아직 어려 보이는 아이들. 여자애들은 커다랗고 뚱뚱하고 둔감해 보이는데, 남자애들은 작고 야위었으며 외로워 보였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이고 귀에는 은색 이어링을 꽂았으며 흘러내릴 것 같이 더럽고 큰 바지를 걸치고 있다.

“저희들끼리 다 짝이 있어. 어린 것들이 집을 나와 도로 가의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동거생활을 하는 거야. 쉽지. 어느 땐 사는 것이 아주 쉬워 보여.”

나는 말을 하고서야 그것이 언젠가 영우가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움찔했다. 미흔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모든 인생은 쉬운 것들이 만드는 치명적인 과오 속에서 출발하는 거지.”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미흔은 미동도 하지 않고 건너편 길이 갈라지는 곳에 선 은행나무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은행나무의 발치엔 샛노란 은행잎이 수북하게 깔려 자동차들이 곁을 질주해 갈 때마다 화르르 날아올라 조금씩 더 먼 곳으로 흩어져 갔다. 나는 화장실을 가야겠기에 차를 한쪽으로 붙여 세웠다.

“커피 뽑아올까?”

미흔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시동을 켜둔 채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푸른 줄무늬 차양을 지나 화장실쪽으로 걸어갔다.

화장실에서 나와 차를 향해 고개를 드니 미흔이 핸드 브레이크 너머로 몸을 던져 운전석으로 옮겨 앉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연해져서 순간적으로 멈칫 섰다가 달리다시피 다가갔다.

미흔은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았다. 가을의 햇빛을 지나 유리창 밖을 노려보는 미흔의 시선은 접시 하나가 공중에서 떨어질 때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나의 놀란 눈과 마주친 미흔은 팔을 내저어 자동차의 문들을 잠그고 기어를 넣었다. 그리고 다시 내 쪽을 쳐다보았다.

퀭한 두 눈이 두 개의 각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

나는 왜 그러냐고 소리치며 차창을 두드렸다. 차는 앞으로 왈칵 쏠리더니 튀어 오르듯이 달려나갔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몇 걸음 따라 달려갔다.

미흔은 뒤에서 8t 트럭이 달려오는 것을 보면서도 이차선 도로로 끼여들었다. 집채만한 트럭이 날카로운 경적을 울리며 일차선으로 휘청 휘어지며 비켜갔다. 미흔은 바로 앞에 정지 신호가 들어와 있는데도 속도를 마구 올렸다. 30, 60, 80, 90…… 다행히 신호등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문득 미흔이 느낄 머리 속의 통증이 나에게 엄습해왔다. 문짝같이 거대한 칼날이 이마에 박혀 천천히 머리를 가르는 것 같은 끔찍한 통증…… 미흔의 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거친 속력으로 달려온 커다란 트레일러가 먼지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몸이 휘어지는 듯했다.

돌풍에 휩싸인 듯 은행잎이 일제히 떨어졌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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