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23]예산 집행

  • 입력 1998년 6월 30일 19시 42분


조선조 탐관오리를 징벌한 암행어사로 이름을 떨친 기은(耆隱)박문수(朴文秀·1691∼1756)선생.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성과를 매긴 행정가로서 그의 치적은 시대를 관통하여 재정개혁을 막 시작한 현 정부에 귀감이 될만하다. 조선시대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도 행정가로서의 어사 박문수의 면모가 그려져 있다.

“그가 호조판서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주요 업무중 하나는 궁궐을 5년에 한번씩 수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담장을 쌓거나 보수한 관리들의 이름을 일일이 벽 안쪽에 새겨 넣었다. 그러자 관리들의 눈빛이 대번에 달라졌다. 담장이 허물어지면 책임을 면할 수 없고 만대(萬代)에까지 이름이 전해지므로 앞다퉈 튼튼하고 보기좋게 공사했다.”

박판서는 공사가 잘못돼 보수비용이 더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발하게도 ‘실명제’를 도입했던 것 같다. 성수대교 사고직후 부실공사를 방지하기 위해 김영삼(金泳三)정부가 도입했던 ‘공사실명제’의 원조격인 셈.

그의 사후 2백여년이 지났지만 성과를 염두에 두고 예산을 집행하는 그의 정신이 관가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 예산은 ‘주인 없는 눈먼 돈’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서해안개발사업 농어촌구조개선사업 등은 주먹구구식 졸속 사업의 대표격이다. 정부 스스로도 그런 평가를 내린다.

광양항에서 시작해 평택항까지 이어지는 서해안 일대의 개발사업은 수요를 감안하지 않은 대규모 국책사업의 전형. 광양항은 부산항에 밀려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고 평택항은 인천항에 밀려 유명무실하다. 또 대불공단 군장산업단지에선 입주업체를 찾아보기 어렵다.

농어촌구조개선사업은 온 농어민을 빚더미에 올려놓은 대표적인 실패작. 정부는 92∼98년 정부 재정 35조원 등 총 42조원을 농어촌에 투자해 구조조정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실효는 극히 미미하다. 갑자기 싼이자(연리 5%)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되자 농어민들은 마구잡이식으로 돈을 끌어다 탕진했다.

전남 순천의 한 농민은 특용작물 재배 목적으로 1억원을 대출받았지만 1천만원만 제대로 썼을뿐 9천만원은 어디 사용했는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최근 정부감사에서 이 사실이 드러나 9천만원을 당장 갚을 수밖에 없게된 그는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걱정이다.

“이자가 싸다는 말에 눈이 멀어 별생각 없이 빌려쓰다 보니까 어느덧 빚더미위에 있더군요. 주위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정부가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기획예산위원회 관계자는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 정책’의 폐해가 크다고 지적한다. 대형 국책사업들이 구체적 계획없이 졸속으로 추진되기 때문이다. 실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대통령이나 장관들의 닥달이 심해 착공날짜 목표를 정해놓고 시간이든 돈이든 끼워맞추기 식으로 일을 벌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89년 발표 때 5조8천억원이 든다던 경부고속철도 사업비가 최근 계산으로 17조8천억원입니다. 처음부터 돈이 많이 든다고 하면 국민의 반대여론이 클테니까 일부러 사업비를 적게 포장하기도 했을 겁니다.”

미국 영국 뉴질랜드 호주 등 선진국들은 이미 10여년전부터 재정개혁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항상 “이 돈이 내 돈이라면 이런 식으로 쓸까”라고 자문(自問)해보도록 공무원을 교육시키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비세일리어시는 대표적으로 재정개혁에 성공한 인구 7만5천명의 소도시. 정부개혁관련 명저인 ‘정부 혁신의 길’ 도입부에 사례가 소개돼 있다.

“공공수영장이 필요했던 비세일리어시는 수영장 건설자금으로 40만달러를 마련했다. 어느날 교육청의 담당공무원은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위원회가 알루미늄수영장을 싼값에 팔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수영장은 새로 지으려면 80만달러는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와 장학사 한명이 부리나케 LA로 가 현장을 살펴보았다.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비세일리어시로 돌아오자 수영장을 소개한 LA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6만달러를 먼저 가져오는 쪽에 수영장을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시의회는 물론 상급자의 승인도 받지 않은채 곧장 LA로 가 6만달러를 지불하고 수영장을 사들였다.”

윗사람의 결재없이 수영장을 산 그가 처벌을 받았을까. 천만의 말씀. 그는 오히려 포상을 받았다. 이 시는 예산절약 보너스제도를 시행중이다. 예산을 집행하고 남는 돈의 15%(요즘엔 건당 1천달러)를 담당공무원들에게 보너스로 지불한다.

선진국의 재정개혁은 집행의 적법성보다는 결과를 평가하는 방향으로 자리잡았다.

영국에선 행정집행 부서(사업소)는 중앙부처와 계약을 체결하고 예산을 따온다. 사업소장은 그 결과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 뉴질랜드 역시 사무차관이 장관과 계약을 맺고 연말에는 예산집행실적을 보고해야 한다. 실적이 계약에 미치지 못할 경우 사무차관에게 책임을 지운다.

우리는 어떤가. 감사원과 국회는 성과보다는 예산집행 과정이 법규에 맞는지를 중점 감사한다. 국민의 피땀어린 돈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였다가 효과도 내지 못하고 돈만 날렸는데도 절차만 적법하다면 그냥 놔둬야할까.

재정개혁에 성공한 선진국의 학자들과 관료들은 “효율적 재정 집행을 위해선 투자책임을 지는 기업가정신이 정부조직내에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경영이론의 대가 피터 드러커도 그의 저서 ‘혁신과 기업가정신’에서 경영방식 도입을 역설했다.

“향후 20∼30년간은 사회혁신, 그중에서도 공공서비스혁신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 현존하는 공공서비스 제도내에 기업가적 경영방식을 도입하는 일이 우리 세대가 당면한 가장 큰 정치적 과제가 될 것이다.”

〈이희성기자〉lee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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