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한국의 민족주의 기업가」/仁村 발자취

  • 입력 1998년 5월 2일 08시 38분


▼「한국의 민족주의 기업가」(인촌 김성수의 생애, 1891∼1955) 김중순 지음 미국 뉴욕주립대 출판부 펴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는 언론 교육 산업의 세 분야에서 민족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선구자였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긴 역사 속에서 각각 그 나름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던 동아일보사 고려대학교 경성방직은 인촌의 선각자적 경륜과 투자 없이는 결코 탄생하지도 성장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그 점만으로도 인촌은 우리 현대사의 거목이라고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 개척적 사업들이 35년에 걸쳤던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독립을 준비하는 민족 자강(自强)운동의 형태로 추진되고 성취됐다는 점에서 인촌은 민족지도자로 뚜렷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토론하고 싶은 것은 인촌이 이끌었던 문화적 민족주의 운동이다. 그는 한말에 우리 민족이 국권을 빼앗긴 원인이 ‘근대화의 지체(遲滯)’에 따른 국력의 쇠퇴에 있었다고 파악하고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뒤늦게라도 근대화를 추진함으로써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신념 아래 특히 언론과 교육 및 산업, 즉 광범위한 의미의 문화 방면에서 일제의 제약과 탄압을 이겨내며 근대화 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사상은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무실역행(務實力行)사상과 같은 궤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촌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온건한 점진주의 독립노선이기에 해외 망명지에서 무력투쟁을 전개하던 독립운동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문화의 변화가 종국적으로는 정치의 변화를 가져오며 그것이 독립을 앞당기는 내부적 힘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믿음으로 일관했다. 실제로 그가 키운 동아일보와 고려대가1960년 4·19민주혁명 때 기폭제의 역할을 수행했음은 우리가 새롭게 되새겨 볼 역사적 사실이다.

인촌은 앞에서 말한 세가지 분야외에 정치 분야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평생 교육자를 자처하고 현실정치에 나서기를 꺼렸으나 해방 직후의 큰 혼란 속에서 민족을 위해 헌신한다는 공인(公人)정신으로 정계에 투신한 뒤 일관되게 독재에 저항하고 민권을 수호하는 민주주의 정치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 점은 한국 야당사가 증명한다.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민주당으로 이어진 제1공화정의 정통 야당은 모두 인촌의 민주적 신념과 지도력에 힘입어 탄생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가 심고 키운 정통 야당이 그 뒤 온갖 탄압 속에서도 국민과 함께 자라면서 마침내 민주주의의 숲을 이룩했으며 그 숲 속에서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도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인촌의 민족사적 업적이 그만큼 컸기에 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연구서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그 연장선 위에서 마침내 미국의 지도적 대학 가운데 하나인 뉴욕주립대학교 출판부는 그의 전기를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테네시대학교 김중순 교수의 ‘한국의 민족주의 기업가:김성수의 생애, 1891∼1955(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A Life History of Kim Songsu,1891∼1955)’가 그것이다.

이 책은 인촌의 64년 생애를 그의 가계(家系)로부터 시작해 부통령으로 선출됐다가 사임한 뒤 별세할 때까지 여러 방면에 걸쳤던 활동들을 객관적으로 그렸다. 20대 청년으로 인수해 중흥시킨 중앙학교의 숙직실에서 3·1운동을 기획하던 일, 동아일보를 대표적 민족지로 키워나간 가시밭같은 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연합국과 제휴한 채 공산당과 투쟁하고, 그 뒤에는 자유당 독재에 맞서 투쟁하던 일들이 감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저자는 지난 5년 동안 참으로 많은 자료들을 두루 살폈다. 인촌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함으로써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들 가운데 미국 굴지의 대학 출판부에서 전기가 출판된 것은 인촌이 처음이다. 이 사실 자체가 인촌의 역사적 위상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영어로 쉽게 쓰여졌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영어 독자들에게 이 책은 한말 이후부터 대한민국 제1공화정 말기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격동적 역사를 큰 부담없이 이해하게 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김학준<인천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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