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27]「괘씸죄」에 걸린 朴준규

  • 입력 1998년 3월 16일 07시 38분


민자당의원들의 재산공개가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키면서 입법부에 ‘사정한파(寒波)’가 본격적으로 불어닥친 93년3월27일.

민자당의 재산공개 진상조사특위 위원장인 권해옥(權海玉)의원은 부동산투기의혹이 제기돼 청와대에서 국회의장직을 사퇴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던 박준규(朴浚圭)의장을 의장공관으로 찾아갔다.

3월22일 재산을 공개한 박의장은 사퇴압력에 반발해 의장공관에서 두문불출하던 중이었다.

당의 입장을 전달하러 간 권위원장은 정치권의 대선배인 박의장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권위원장은 소파에 앉아 있는 박의장에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 채 완곡하게 당의 입장을 전했다.

“직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드리는 말씀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의장님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용단을 내려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박의장은 “부실한 아들을 위해 집을 사준 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냐”며 얼굴을 붉혔다.

결국 권위원장은 “당의 뜻을 전한 것일 뿐”이라며 5분만에 ‘임무’를 마치고 의장공관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당시 박의장의 의장직 사퇴는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기정사실로 굳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김대통령은 박의장의 재산문제가 언론에 불거지자 당의 핵심라인에 “사표를 받으라”고 지시한 뒤 직접 채근까지 하고 있었다.

언론에는 연일 ‘아들 명의로 땅 21만평 구입’ ‘석촌동에 벌집(임대주택) 70여채 운영’ 등 박의장의 재산과 축재과정을 문제삼는 기사들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인민재판식 여론몰이’라며 반발하던 박의장은 오랜 지기(知己)인 김종필(金鍾泌)대표의 탈당종용을 받고 결국 3월말 민자당을 탈당했다.

그러나 의장직 사퇴문제에 대해서만은 “부동산 투기의혹에 대한 유언비어가 사실과 다르고 정당한 축재란 점을 당 고위층 인사가 분명히 해줘야 사퇴할 수 있다”면서 강경하게 버텼다.

▼ 『국회에 나가 해명하겠다』

4월 초까지도 타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정치부기자 시절부터 박의장과 가깝게 지낸 주돈식(朱燉植)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나섰다.

이때 사진기자들이 박의장의 동정을 취재하기 위해 의장공관에서 가까운 빌딩이나 고가사다리 등에 진을 치고 망원렌즈로 산책하는 모습까지 촬영하는 바람에 박의장은 ‘어항속의 고기’ 신세가 돼가고 있었다. 전의(戰意)도 누그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수석〓의장직 사표를 내시지요.

박의장〓내더라도 잘못이 있어 내는 게 아니오. 나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고 명예가 땅에 떨어져 사회를 볼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소. 국회에 나가 나의 사정을 설명하고 외국에 나가겠소.

그러나 주수석은 “국회에 나가 연설을 하면 사퇴안 표결투표에 영향을 주고 정계가 시끄러워진다”고 설득했다.

박의장은 “나의 부동산 투기의혹에 대한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만은 후손을 위해서라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맞섰다.

결국 이날 담판은 박의장의 석명서(釋明書)를 의사록에 싣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주수석은 사퇴약속을 받아내는 대신 박의장에게 외유를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민주계 핵심세력의 분위기는 박의장의 출국문제에 대해서조차 ‘재산문제가 해명된 후 김대통령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올 만큼 강경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이날 박의장은 의원직 사퇴까지 종용하는 주수석에게 “지역구에서 뽑힌 만큼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며 완전히 백기(白旗)를 들지는 않았다.

“40년 친구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가….”

당시 박의장이 섭섭해 했던 것은 김대통령이 ‘바람막이’가 돼 주지 않았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산공개 파문의 와중에서 김대통령이 “박의장의 재산이 그렇게 많았나”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는 배신감까지 느꼈다는 게 박의장의 술회다.

자수성가한 부친 박노익(朴魯益·60년 작고)씨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보험회사(현재의 쌍용화재)까지 경영했던 자신의 재산증식과정을 김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

특히 몸이 불편한 아들을 위해 미리 아들 명의로 재산을 마련해준 ‘아픈 사정’을 누구보다 김대통령이 잘 알고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결국 박의장은 자신이 ‘괘씸죄’에 걸렸다고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박의장을 사퇴로 몰고간 경위에 대한 박의장측과 김대통령 측근들의 설명은 엇갈리고 있다.

김대통령의 한 측근의 설명.

“당시 재산공개가 ‘구 민정계’를 암묵적으로 겨냥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목표나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박의장을 죽인 것은 바로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의장은 “김대통령의 비선 조직이 나를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 분명하다”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박의장에 대한 김대통령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낙천적인 성격의 박의장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92년 대통령선거를 한달여 앞둔 11월 중순 어느날.

김영삼민자당후보는 대구 경북(TK)지역의 도움이 절실해지자 박의장을 요인들과의 독대(獨對)를 위해 사용하던 신라호텔내 ‘비밀캠프’로 초대해 저녁을 함께 했다.

김후보〓87년 대선 때도 도와주지 않고…. 왜 김재순(金在淳)이처럼 발벗고 도와주지 않는 거요.

박의장〓지구당과 동창회를 통해서 도와주고 있지 않소. 내가 중립을 지켜야 하는 현직 국회의장인데 어떻게 전면에 나서서 도와줄 수 있겠소.

엇갈리는 대화 끝에 김후보는 “언제까지 의장을 하겠다고 그래”라며 언성을 높였다. 박의장도 “국회의장 안하면 그만이지만 하는 동안에는 의장의 존엄성과 독립성을 지켜야겠어”라고 맞받아쳤다.

결국 이날의 만남은 김후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남으로써 결별의 자리처럼 돼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김후보는 “87년 선거 때 박의장이 노태우(盧泰愚)후보를 도왔다”며 섭섭한 감정을 사석에서 여러차례 토로했다.

이 때문에 3당 합당으로 민자당 대표가 되고 나서 노태우대통령이 박의장을 지명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하자 반대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박의장의 설명은 다르다.

“87년 대선 전에 고 김동영(金東英)의원이 찾아와 ‘공화당의 당의장까지 한 사람이 공공연히 도우면 오히려 득표에 도움이 안된다’고 뒤에서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선거 직전에 아예 중국으로 외유를 떠났고 그래서 투표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태가 더욱 꼬인 것은 김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였다.

평소 의원외교에 관심을 보였던 박의장은 김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동남아 순방에 나섰다.

“동남아를 이대로 두면 일본권에 넘어간다”는 한 동남아지역 대사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

그러나 순방을 다녀와 인사하러 간 박의장에게 김당선자는 “이렇게 급한 판에 거기는 왜 가느냐”며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 『YS에게 친구란 없어』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대선에 패배한 뒤 정계를 은퇴하고 당시 영국에 가있던 김대중(金大中·DJ)전민주당 총재의 재산공개 파문에 대한 대응은 뜻밖이었다.

김전총재는 동교동 출신 측근 등 30여명의 의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국회의장을 저런 식으로 당하게 해서는 안된다”며 “도와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의장이 여론과 여권 내부의 사퇴압력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버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태도’란 이유로 박의장의 사퇴에 반대한 야당의 지원도 큰 힘이 됐었다.

결국 YS와 DJ의 상반된 대응은 97년 대선판도를 바꿔놓는 불씨가 된 셈이다. 박의장은 ‘마음의 빚’을 잊지 않고 자민련내에서 ‘DJP연합’에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재산공개 한달만인 4월22일 의장직을 사퇴한 박의장은 4월 말 큰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출국해 6월30일에는 의원직까지 내놓았다.

사퇴의 변은 역시 재산공개 파문으로 의원직을 사퇴한 김재순전국회의장의 ‘토사구팽(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에 화답이라도 한 듯 ‘격화소양(가죽신을 신고 가려운 발을 긁는다)’이었다. YS에 대한 감정을 빗댄 것일까.

미국에서 5개월 머무르는 동안 박의장은 온갖 병으로 시달렸다. ‘화병’이었지만 의사의 진단은 ‘피로증후군’.

93년 9월말 귀국한 박의장은 이후 두차례에 걸친 김대통령의 청와대 초청을 모두 거절했다.

“오염된 사람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청와대도 오염된다”는 독설을 거절의 이유로 내세웠다.

박전의장은 “YS에 대한 감정은 이미 잊었다”면서도 “YS에게는 친구는 없고 상하관계만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은 개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팽(烹)’당한 만큼 ‘토사구팽’이 아니라 ‘토사우팽’이라고 말했다.

〈이동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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