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오탁번 시화」,교수시인이 쓴 시 이야기

  • 입력 1998년 3월 2일 08시 45분


시인 오탁번(고려대교수)이 편지를 썼다. 수취인은 비평가 친구나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될 날을 학수고대하는 국문과 대학생도 아니다.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서 자기의 존재가 무겁다든지 가볍다든지 또 크다든지 작다든지도 모르고, 앞으로 그의 앞에 닥칠 시련에 대하여 아무런 예감도 못하는 어린 학생’, 처음으로 자신의 시가 활자화돼 실린 잡지를 읽으며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던 ‘원주중학교 2학년2반 오탁번군’, 그 때묻지 않은 철부지마음에 보내는 것이다.

96년 한 해 동안 월간‘현대시학’에 연재했던 것을 나남출판사에서 ‘오탁번시화(詩話)’라는 제목으로 묶어낸 이 책. 시인들에 대한 얘기가 있으니 작가론이기도 하고, 시에 대한 분석이 있으니 시론이기도 하며, 이런저런 자기 얘기가 있으니 신변잡기수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형화된 틀로 재단하지 않고 저자의 의도만을 좇아가자면 이 책은 부제가 말하는 대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을 위하여 먼저 시인이 된 이가 곰살스럽게 속삭이는 시 이야기’일 뿐이다.

‘시쓰는 마음(詩心)’은 무엇인가. 40년간 시를 써온 시인이자 시를 가르치는 교수님이기도 한 ‘시 전문가’ 오탁번은 그 마음을 어떤 명작이 아닌 딸 가혜가 초등학교 5학년때 받았던 연애편지에서 찾는다. 말로는 못하고 모스부호로 ‘가혜 안녕?… 왠지 네 옆에만 가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도망가고 싶었다. 기분 탓일까? 난 빨리 키가 크고 싶다. 가혜, 너처럼’이란 고백을 정성스레 적어보냈던 소년의 떨림.

저자는 “시의 비의(秘義)는 무선전신부호로 된 이 아이의 편지와 무엇이 다른가.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정성을 다하여 편지를 쓰는 초등학생의 편지쓰기와 오늘날 시인들의 시쓰기는 어느 것이 더 오랜 정성과 고뇌의 산물인가. 국화빵과 시를 혼동하는 시인은 과연 없는가”하고 묻는다.

김소월 조지훈 박목월 서정주 이기영 한용운 김종길 송재학 송수권 최승자 박남철…. 자신을 시인이게 하는 그 무수한 이름과 작품을 그는 ‘암탉이 둥우리에 갓 낳은 따뜻한 달걀처럼 그렇게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온기’로 소곤소곤 말한다.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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