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⑥]「나홀로」 맑았던 YS의 금욕

입력 1998-01-14 19:42수정 2009-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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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다음날인 93년 2월26일 새벽5시.

상도동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조깅을 나서려던 김대통령은 청와대 현관문 앞에 ‘낯선 운동화’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도동 때부터 평소 신던 운동화가 아니었다.

김대통령이 대통령의 조깅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중이던 경호원들을 찾았다.

▼ “신던 조깅화 어디갔노”호통 ▼

“뭐할라꼬 새 신발을 갖다났노. 내가 신던 신발은 어디갔노.”

예기치않은 대통령의 말씀에 놀란 경호원들은 부랴부랴 김기수(金基洙)수행실장을 깨웠다.

“각하께서 상도동 때부터 신던 운동화를 찾는 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김실장은 순간 “아차”했다. 그와 동시에 흙탕물이 잘 빠지지 않아 누렇게 물든 상도동 시절의 운동화가 떠올랐다. 급히 상도동을 관할하고 있는 노량진경찰서장에게 전화했다.

“상황이 급하니 지금 바로 상도동을 경비하고 있는 직원에게 연락해 각하께서 쓰시던 운동화를 찾아 청와대로 보내 주십시오.” 청와대에서 상도동까지 갔다 오는 것보다 상도동 자택을 경비중인 경찰이 운동화를 찾아오는게 훨씬 빠를 것으로 김실장은 판단했다.

아닌게 아니라 노량진서 직원은 그로부터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운동화를 갖고 달려왔다. 김대통령은 ‘상도동 운동화’로 조깅을 마쳤다.

물론 새 신발보다는 평소 신던 신발이 편한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김대통령은 단순히 신기 편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굳이 상도동 운동화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김대통령은 취임초부터 이른바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자신이 제창한 ‘윗물맑기 운동’의 핵심 덕목으로 설정하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의 ‘금욕주의’는 그가 문민개혁의 으뜸과제라고 자부했던 부정부패 척결, 또는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정치자금 근절선언과 한 몸이었다.

청와대 안가(安家)철거, 청와대의 칼국수메뉴, 공직자들의 골프금지, 청와대수석비서관 장관들은 물론 여당 당직자들에게 ‘촌지(寸志)안주기’, 명절 때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내던 멸치돌리기 중단 등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같은 금욕주의의 산물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 87년 대선 직후 김영삼총재의 통일민주당에 합류, 작년에 청와대정무수석을 지낸 강인섭(姜仁燮)전의원의 증언. “김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 시내 한정식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당시 김대통령은 매우 금욕주의적인 각오를 되풀이 피력했습니다. 예컨대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은 정해진 출퇴근도 없었고, 안가에서 밤늦게까지 술먹고 다음날에도 늦게 나오는 일이 많았다며 자신은 결코 흐트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김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화제’를 불러일으킨 칼국수.

문민정부 초기 청와대정무수석을 지낸 주돈식(朱燉植)씨는 그의 국정체험기라고 할 수 있는 ‘문민정부 1천2백일’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칼국수로 점심을 주로 하는 이유는 전, 노 두 전임대통령이 매일 청와대에서 파티 등 먹자판을 벌인데 대한 국민의 혐오감을 의식해 간소한 식탁을 마련해야겠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자신이 또 원래 국수를 좋아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지만…. 한번은 실무진에서 대통령의 건강을 생각해 오찬테이블에 수육 몇 점을 올렸다. 김대통령은 바로 홍인길(洪仁吉)총무수석을 불러 ‘씰데없는 짓 하지말라’고 명을 내렸다.”

지금도 서울소공동 롯데호텔 38층의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양식당엔 ‘YS국수’라는 메뉴가 있다. YS가 대통령이 되기 전 국수를 좋아하는 김대통령을 위해 특별히 만든 메뉴. 국수위에 해물소스를 얹은 것으로 김대통령과 함께 메트로폴리탄에서 이 메뉴를 본 사람들은 이 음식을 ‘YS국수’라고 불렀다.

계속되는 주돈식씨의 회고.

“단조로운 칼국수메뉴에 딱 한번 수육 5점을 먹은 일이 있었다. 94년 7월9일 12시5분쯤.

김대통령은 이날 여성특위위원들과 오찬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는데 공보수석실에서 쪽지가 들어왔다.

‘김일성 사망’이었다. 내가 놀라는 순간 옆에 있던 김석우의전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오찬이 간단히 끝나고 국가안보회의, 임시국무회의가 잇달아 열렸다. 국무회의가 끝난 뒤 대통령 주재로 김덕안기부장, 이병태국방장관, 박관용비서실장, 정종욱안보수석, 그리고 내가 저녁을 먹으면서 밤9시까지 사태를 분석했다. 이날 저녁은 평소와 달리 설렁탕에 김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수육5점이 추가됐다. 이것이 내가 청와대에서 봤던 1천일까지의 식생활이었다.”

칼국수와 관련된 일화 한토막.

조각(組閣)발표 다음날인 93년 2월27일.

김대통령은 신임 국무위원들과의 첫 ‘칼국수 오찬’에서 허신행(許信行)농림수산부장관이 “지금 농민들 사이에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일고 있는데 청와대 칼국수도 우리 밀을 쓰는게 좋겠다”고 하자 즉각 ‘우리밀 칼국수’를 지시했다. 그러나 ‘우리밀 칼국수’는 끈기가 없어 숟가락으로 먹는게 나을 정도였다.

이때 기자실 지원부서인 춘추관의 박영환(朴榮煥)관장이 당시 청와대를 출입하던 MBC 이인용(李仁用·현 9시뉴스 앵커)기자의 모친이 안동출신으로 ‘안동국시’에 조예가 깊다고 귀띔했다. 이 얘기가 청와대 주방장에게 전해졌고, 결국 주방장이 이인용기자의 집에까지 찾아가 ‘음식지도’를 받은 끝에 지금처럼 콩가루를 넣은 칼국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칼국수와 함께 시작된 골프금지령도 김대통령의 ‘개혁 금욕주의’를 상징하는 ‘YS브랜드’였다.

지금은 김대통령이 취임초 ‘재임기간중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후부터 공직사회에 골프금지령이 퍼졌다는게 ‘상식’처럼 돼있다.

그러나 말도 많고 뒷얘기도 많은 골프금지령은 황인성(黃寅性)총리의 ‘김심(金心·김대통령의 의중)헤아리기’에서 시작됐다.

첫 국무회의가 있었던 2월27일은 토요일.

김대통령으로부터 ‘공무원의 자기혁신과 정화(淨化)’ 지침을 듣고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돌아온 황총리는 총리실 간부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공무원 봉급으로 한 번 나가면 한사람당 10만원씩 들어가는 골프를 주말마다 칠 수는 없지 않느냐. 결국 신세를 지게 된다. 총리실 간부들부터 골프장출입을 자제토록 하자.”

▼ “청와대 골프연습장 없애라” ▼

황총리의 말은 즉각 3급이상 고위공직자들의 골프안하기 결의로 이어졌다.

그리고 3월21일 김대통령의 청와대 경내 골프연습장 폐쇄지시, 4월12일 김종필(金鍾泌)대표의 골프회동에 대한 청와대의 ‘경고’가 이어지면서 골프장출입은 김영삼정부의 가장 확실한 ‘금기(禁忌)사항’중 하나가 됐다.

3월21일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던 김대통령은 헬기장에 설치돼 있는 골프연습장을 발견했다.

헬기장이 있는 높은 곳에서 아래 쪽을 향해 드라이브 샷을 하면 청와대를 경비하고 있는 30경비단 소속 군인들이 골프공을 주워온다는 것이 수행한 박상범(朴相範)경호실장의 설명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들이 즐기던 연습장이었다. 얼마쯤 가니 또 한 곳의 골프연습장이 있었다. 영부인들의 골프연습장이었다. 김대통령은 즉각 폐쇄를 지시했다.

한번은 ‘상도동 가신’인 홍인길총무수석이 김대통령에게 넌지시 ‘골프해금’을 건의했다. 그해 8월 청남대 휴가 때였다.

홍수석은 3년뒤인 96년 정기국회 때 본회의중이었는데도 동료 의원들과 골프장을 출입하다 구설수에 오를 정도로 ‘골프광’이었다.

“각하, 잔디는 사람이 밟아줘야 잘 자라고 잔디밭 산책은 건강에도 좋습니다.”

간접화법이었지만 ‘용맹무쌍한 건의’였다.

김대통령은 그러나 “다 좋은 얘기지만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후부터는 김대통령 면전에서 골프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김대통령의 ‘금욕주의’가 지향하는 목표지점은 그가 취임사에서 ‘열변’을 토한 것 처럼 문민개혁의 3대 과제, 즉 부패척결 경제살리기 국가기강확립을 통한 ‘신한국 건설’이었다. 그러나 1천2백일을 곁에서 지켜본 주돈식씨는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고 있는 동안 이른바 ‘측근실세’들은 밖에서 스테이크 대접을 받고 있었고, 윗물이 맑아도 아랫물은 맑아지지 않은채 아랫물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YS 혼자만의 ‘금욕주의’였고, 방향성을 잃은 ‘도덕주의’였다.

〈김창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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