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금융위기는 미국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경위야 어떻든 미국의 도움으로 급한 불을 껐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인천상륙작전에 비유했다. 미국을 필두로 대한(對韓)금융지원에 나선 13개국을 보고 한국전 참전 16개국을 연상한 사람도 많았다.
일단 위기를 넘겼지만 미국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다르다. 「한국경제를 완전히 주저앉혀 놓고 통째로 먹으려 한다」는 비판론도 있다. 국익론을 펴는 사람도 있다. 「한국이 이뻐서가 아니라 결국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얘기다.
평가는 잠시 유보하자. 위기가 끝난 것도 아니고 미국이 계속해서 이처럼 도와줄 수 있을지도 사실은 의문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이번에 사용키로 한 외환안정기금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되는 돈이라고는 해도 그렇다고 여론의 승인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미 의회는 내년 1월중에 한국의 금융위기에 관한 청문회를 열 계획이다.
중요한 것은 한번쯤 미국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한 직원이 말한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는 『잘못은 한국이 해놓고 도와주는 사람에게 그 원인과 책임을 추궁하는 것처럼 미국인들의 눈에 비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의 얘기가 아니다. 대다수 미국인은 한국사회의 이런 분위기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헤리티지재단의 한 관계자는 『한국인들은 언제나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일 뿐」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미국만의 이익인가』라고 되물었다.
반미(反美)적인 것은 언제나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그것은 단순 명쾌하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합리성이 결여돼있다. 80년대 반미운동이 불길처럼 번질 때 용미론(用美論)을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을 미워할 게 아니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확실히 「용미」의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이재호(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