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차수진/뺨 맞은 아이

  • 입력 1997년 12월 3일 08시 13분


그날은 마치 봄처럼 따스해 손잡고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딸아이 승현이와 동네를 한바퀴 돌아도 좋을 듯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좁은 집안에서만 때굴거리느라 갑갑해하던 딸아이를 데리고 모처럼 밖으로 나섰다. 고요에 잠긴 아파트 여기저기를 걷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서 또래의 사내아이가 달려오더니 승현이 앞에 딱 멈춰섰다. 어떤 장면이 벌어질지 지켜볼 양으로 슬그머니 손을 놓고 옆으로 비켜섰다. 따스한 햇살속에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이 조용하기만 하던 산책길에 22개월짜리 남녀의 만남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두 꼬마의 눈이 같은 높이에서 잠시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그 아이의 손이 올라가더니 정확하게 승현이의 뺨을 치는 게 아닌가. 승현이가 그 애를 안으려고 팔을 벌리는 것과 동시였다. 마치 내가 얻어맞은듯 발끈 화가 치밀어 한발 성큼 다가섰다. 순간 모든걸 보고 있었던듯 그 애의 엄마가 화들짝 달려오더니 별로 죄송하지도 않은 얼굴로 죄송하다면서 애를 데리고 가버렸다. 승현이는 자기가 왜 맞았는지도 모르는 채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마터면 왜 되받아서 한대 때려주지 못하고 맞고만 있었느냐고 나무랄 뻔했다. 하지만 아무런 경계심 없이 순수하게 다가서려던 그 예쁜 마음이 느닷없는 「폭력」으로 상처받았을 것 같아 애처로움이 앞섰다. 하얀 백지인 아이의 인생이 이렇듯 사소한 일상들로 하나하나 색칠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은 일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퇴근한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펄쩍 뛰며 대뜸 아이를 앞에 앉혀놓고 한마디 한다. 『승현아, 누가 니를 때리면 니도 팍 때려야 한데이. 가만히 맞고 있으면 안돼. 알았제』 아무리 강하게 키워야 한다지만 폭력을 가르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싶어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고상한 품성만 내세우다 자기방어조차 못하고 맞기만 한다면 그것도 못 볼 일이지 싶다. 때리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는 안된다고 해야 할까. 모쪼록 좋은 모습으로 우리 아이의 훌륭한 거울이 되어야 할텐데. 「부모노릇」이 채 2년도 안되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정말 어렵고 중요하다는걸 새삼스레 느낀다. 차수진 (경남 창원시 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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