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충식/나무의 겨울나기 지혜

  • 입력 1997년 12월 1일 20시 03분


앙상한 가지들이 찬바람에 떨고 있다. 여름날의 그 풍성하던 잎새는 온데간데 없다. 푸르고 당당하던 활력과 기세를 접고 쓸쓸히 시린 겨울을 맞고 있다. 이제 칼바람과 눈보라에 부대껴야 할 나날은 그 얼마나 어둡고 기나긴 고통일 것인가. 이 춥고 떨리는 아침, 거리의 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주가고 환율이고 물가 고용 모든 것이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만 같은, 거기에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게되면 더더욱 실업은 늘고 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는 암담한 소식뿐인 이 아침, 우리들의 우울한 겨울을 생각한다. ▼ 간소하게 가지만 남긴 채 ▼ 나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잎을 떨구어버려야 산다는 섭리를 익히고 있었다. 가을이 되어 공기가 건조해지면 수분부족에 적응하기 위해 벌써 잎을 떨굴 준비를 시작한다. 잎은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공기중의 이산화탄소와 뿌리로 끌어올린 물로 탄수화물을 만들어 나무를 살리고 키운다. 여름내내 계속하던 이 잎들의 광합성(光合成)작용이 가을이면 멈추는 것이다. 겨울로 접어들며 물 부족은 더해진다. 나무는 수분손실을 막기 위해 잎사귀의 기공(氣孔)을 닫는다. 기공이 닫히면서 광합성도 일어날 수 없고 결국 낙엽수의 잎은 죽어 떨어지게 된다. 나무는 혹한을 살아 남기 위해 스스로 잎을 떨구고 겨울을 나는 것이다. 간소하게, 줄기와 가지만 남긴채 칼바람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무나 풀도 때를 안다(草木知時)는 말이 그것이리라. 자연환경과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며 피고 지는 초목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환경변화와 타이밍을 인식하고 대처하는데(知時) 실패한 채로 참담한 공황(恐慌)의 겨울을 맞는 것은 아닐까. 푸르른 여름날과 땡볕은 무한한 것으로, 「거품」의 황홀함은 영속하는 것처럼 낙관하고 착각했던 것은 아닌지…, 여름 단꿈에 너무 취해 가을이 오고 겨울이 닥치는 것을 애써 눈감아 버리진 않았는지. 아파트나 자동차는 크고 넓어야 좋고, 여행은 해외로, 그것도 비싸고 먼 데라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외투는 세계 최고급 밍크라야 알아주고, 술은 30년 숙성 위스키라야 쳐주는 소비패턴. 너 나없이 개방과 세계화의 이름으로 사치와 과소비를 얼버무린 채 살아온 것은 아닌가. 「거품」은 문화와 삶의 방식에까지 스며들었다. 미술품도 크기가 커야 가치도 높다는 식이고 가격 또한 거품처럼 부풀었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교회당도 비싸고 호화롭게 지어야 교세의 상징이 되고 신도가 모이는 양상이었다. 출판 음악 공연 모든 분야의 문화가 바로 「거품」 체질에 젖어왔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언젠가는 부서지고 말 운명의 「거품」이라는 비정상을 정상처럼 여겨 왔던 것이다. 추위는 이미 몇년전부터 예고되고 있었다. 한국이 반도체로 떼돈을 벌고, 엔화가치 상승으로 반짝수출 재미를 볼 때 그것이 이상난동(異狀暖冬)임을 알고 대처했어야 했다. 그리고 외국이 우리 기업과 은행에 돈을 대면서 무섭도록 많은 정보를 갖고 우리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음을 간과했다. 기업도 정부도 가계도 환경변화 읽기에, 정책 타이밍(知時)에 다 그르치고 오늘의 추위를 맞고 있다. ▼ 살을 에는 「IMF삭풍」 ▼ 이제라도 나무의 겨울나기로부터 배울 일이다. 고통스럽지만 잎사귀를 떨구어버리고 앙상하게, 간소하게 삶의 방식을 조정할 일이다. 크게는 IMF구제금융체제하의 경제 사회적 구조조정에서, 작게는 개인의 소비패턴에 이르기까지. 다들 거품에 취해 흥청망청해 온 죄업을 닦는 마음으로 겸허하게 고통을 추스를 수밖에 없다. 봄을 봄답게 맞기위해서라도. 김충식(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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