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김회상/어느 여중생의 「용기」

  • 입력 1997년 9월 2일 07시 39분


휴가를 다녀와 다시 일상에 묻힌지도 벌써 열흘여가 지났지만 아직도 그 「사건」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라 희비가 교차되곤 한다. 장호원읍과 음성군 주천면을 잇는 길이 1백여m의 다리를 지나던 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차량을 세운 채 간밤의 소나기로 잔뜩 불어난 냇물을 긴장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봤더니 어떤 사람이 불어난 흙탕물에 뜨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양쪽 제방에는 경찰관, 수중장비를 지닌 구조대원은 물론 밧줄을 든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할 뿐 감히 물속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옷을 입은 그대로 물 속으로 뛰어들더니 헤엄쳐가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가족이 아니고서야 누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저렇게 뛰어들 수 있을까 하며 모두들 가슴을 졸이며 지켜봤다. 거센 물살을 헤치며 용케 다가간 여자는 냇물 한가운데에서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을 끌고 둑으로 돌아왔다. 몹시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오더니 여자를 도왔다. 그런 와중에 여자는 태연스레 젖은 옷과 머리를 털고 신발을 신더니 어디론지 조용히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건져 올린 사람은 이미 숨져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물에 뛰어들어 구조에 나섰던 여자는 숨진 사람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장호원의 한 여중생이었고 사건이 있은 뒤 관계공무원으로부터 『사진촬영을 하려 했는데 왜 뛰어들어 건져 올렸느냐』는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여학생이 제방 가까이 돌아올 때까지 누구 하나 발에 물을 묻힌 사람이 없었는데도 지역 구조대는 『우리가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건졌다』고 자랑을 했다는 씁쓸한 이야기도 들었다. 구색이나 맞추려는 담당공무원이나 생색내기에 바쁜 구조대의 행태를 생각하면 우리네 살아가는 방식이 괜스레 서글퍼진다. 그러다가도 선뜻 물살 속으로 뛰어들고도 조용히 사라진 어린 여학생을 떠올리면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의롭고 순수한 마음들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여학생에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김회상(서울 중구 남대문로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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