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인준/경제엔 임기가 없다

  • 입력 1997년 8월 25일 20시 17분


『李會昌(이회창)대표를 도와주라』 『지켜보기만 해달라』 金泳三(김영삼)대통령과 李仁濟(이인제)경기지사가 지난 13일 주고 받았다는 대화 내용 중 한 토막이다. 요컨대 대통령의 말발이 서지 않는다는 사례다. 실정(失政)과 직계비리로 민심을 잃은 레임덕(임기말 대통령)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끝나지 않았다. 기업과 금융계와 다수 국민은 정부의 효과적인 경제 위기관리 처방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에 있어서 수개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금융 비즈니스는 분초를 다툰다. 姜慶植(강경식)부총리는 지난 3월 취임하면서 『정권에는 임기가 있어도 경제엔 임기가 없다』고 말했다. ▼ 정부 입맛따라 시장 개입 ▼ 더구나 지금은 정부가 가만히 있어도 경제가 저절로 잘 굴러가는 형편이 아니다. 금융시스템에 고장이 났고 기업들이 위태롭다. 외국 금융기관들이 우리 금융기관과 대기업에 돈 빌려주기를 꺼린다.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정부보증 없이는 외화를 꿀 수 없게 된상황은분명 위기다.선진국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나라로서는 벼랑 끝까지 몰린 형국이다. 환율도 당국의 조절능력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 외환위기 금융위기라는 말이 결코 엄살이 아니다. 현정권의 임기가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음에도 바로 이같은 경제사정 때문에 정부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져왔다. 앞으로 수개월은 그런 점에서 현정부가 4년여 동안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정책의 힘을 잘 발휘할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최근의 경제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위기론에 대해서는 『위기는 무슨 …』이라며 짜증이나 부리고 기업지원론에는 『시장에 맡긴다』는 말로 반응하며 몇달을 보냈다. 그러면서 구조조정론을 되뇌기에 바빴다. 이 기회에 쓰러질 놈은 없애고 살 놈만 남긴다는 얘기다. 무한경쟁시대에 경쟁력 없는 기업이 모두 살아남을 수는 없다. 정책의 힘이 경쟁력 없는 기업을 지탱시키는 데 낭비돼서는 안된다. 그러나 경제와 기업의 모든 원인과 결과를 말 그대로 시장에 방임할 만큼 우리의 시장시스템이 성숙돼 있는가. 실제로 시장에 완전히 내맡기고 있는 것도 아니다. 金仁浩(김인호)대통령경제수석은 지난주 『기아그룹의 부도유예 연장은 상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책책임자가 적정환율에 대한 견해를 밝혀 외환시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과 닮은 시장개입이다. 『정부 입맛에 따라 시장을 흔들어대면서 시장에 맡긴다니 우습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개입 자체를 문제삼자는 것이 아니다. 최근 수년간 미국 경제는 「경기순환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끝 모를 호황을 누리고 있다. 미국 경제의 안정과 활력에는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중앙은행)의장과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수훈갑이라는 평가가 심심찮다. 시장시스템이 잘 가동되는 미국에서조차 정책 처방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 금융대책서 빠진 「기아」 ▼ 문제는 유효한 정책의 적기(適期) 구사다. 강경식경제팀은 25일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차치하고 과연 그렇게 시간을 끌어야 했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정부는 『금융시장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은 기아사태가 직접적 원인』이라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이번 발표에 기아대책이 빠진 것은 또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원인 치료는 않겠다는 것인가. 지금이 차입경영 수술 등을 둘러싸고 기업들과 소모전을 벌일 때인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당국자들이 기업을 너무 피곤하게 만든다』는 소리가 정부 안에서까지 새나온다. 구조조정과 위기타개를 조화할 수 있는 정책능력 발휘를 기대한다. 배인준(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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