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박용진/어느 할머니의 「6월病」

  • 입력 1997년 6월 25일 07시 50분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할머니의 반찬가게를 찾았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예의 지병이 또 도진 모양이다. 신체적 병이 아닌 마음의 병이다. 하지만 아무도 할머니의 병을 알지 못한다. 그저 날이 더워 며칠 쉬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할머니는 6월의 이 지병 말고는 가게 문을 닫는 일이 없다. 예순 여덟의 나이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50대처럼 정정하다. 동네시장 귀퉁이에 「할매반찬」이란 작은 가게를 차려놓고 옛날 반찬들을 손수 만들어 판다. 오이 마늘종 같은 장아찌하며 깻잎절임 게장 고추장 된장 간장 등 주로 맵고 짭짤한 반찬들이다. 특히 검누런 할머니의 옛날 간장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깊고 그윽한 맛을 낸다. 나는 할머니의 반찬을 먹으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한다. 반찬맛도 그렇지만 얼굴표정이나 목소리까지 꼭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이다. 이사온 후부터 「할매반찬」을 이용하다 가게의 문이 닫혔을 때 어찌나 궁금했던지 이웃가게에 수소문하여 할머니집을 처음 찾아갔었던 게 10년쯤 전의 일이다. 산동네 외진 곳이었다. 할머니는 혼자 사셨다. 남편은 휴전된 해 6월 김화전투에서 전사하셨단다. 그때 네살된 아들을 안고 있었는데 헌병 두사람이 하얀 유골상자를 들고 왔더란다. 그뿐 아니라 그 아들이 장성하여 경찰관이 됐는데 삼척 무장공비 토벌 때 또 전사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들은 일찍 장가를 들어 그때 두살짜리 손자를 하나 두었으나 며느리가 재가하면서 데리고 갔단다. 한 10년간은 해마다 6월이 되면 찾아오곤 하다가 최근 몇년전부터는 오지 않는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귀신도 눈이 삐었지, 나같은 건 안잡아가고…』 이번에도 나는 작은 선물을 사들고 할머니집을 찾아갔다. 전날밤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렸지만 맑은 하늘이었다. 황토마당 한구석에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먼산만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 나도 그 옆에 앉아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 먼 산을 바라 보았다. 할머니의 슬픈 마음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한참만에 나는 할머니를 보며 『내일은 가게문을 열어야지요』했다. 그제야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데 주름진 얼굴에 눈물이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박용진(건강사회실천운동협의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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