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지상의 한 사나흘」

  • 입력 1997년 6월 3일 08시 08분


(강계순 지음/문학수첩/6천원) 노년의 어느날 수십년간 써온 일기를 다시 읽는다고 생각해보자. 아니면 몇년에 한번씩 찍었던 증명사진을 순서대로 죽 늘어놓고 보는 기분이라면…. 환갑을 맞는 저자는 그런 일을 했다. 40년 가까이 써온 시를 시간의 흐름과는 역순으로 다시 묶었다. 20대에 『시만이 가장 가치있고 가장 높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시인이 눈 멀었을 때 그 이유는 「순결한 것을 향한 열망」이었다. 「이 봄에 입으리라 끄내어보니 치마폭엔/얼룩이 눈물같이 펼치고 지워도 지워도/짙은 회오의 그림자/과일 잠시 숨어 먹다가 치마 한벌 못쓰게한/뉘우침이 이러한데 내 영혼 속에 묻어/떨칠 수 없는 부끄럼, 암만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이 얼룩은 어찌할까」(「얼룩」) 일상의 먼지에 스스럼 없어질 중년에도 여전히 「…하늘에 날카로운 줄 그으며/팽팽하게 견디고 있는 전선처럼/팽팽하게 곧추 앉아서 아주 비어있기로 했어」라고 버티던 시인은 아버지를 한줌 재로 뿌린 후 「…정작 내가 할 일은/모두 다 버리고 또 버리고/떠나는 일 떠나보내는 일/고개 끄덕이며 아는 일이었다」고 독백한다. 시인은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여 정화하는 「평정」의 바다로 향한다. 「…극도의 압축에도 터지지 않고/조용히 억장 무너지는 법/맹렬한 불길에도 넘치지 않는 법/곤죽이 되어 풀리는 법 이젠/알 것 같아/원래는 빛이던 것 초록이던 것/약속이던 모든 것 끓이고 또 끓여/서로가 서로에게 스미듯 흔적없이/풀기로 했네」 (「압력솥」).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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