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홍의 세상읽기]기생 바람

  • 입력 1997년 5월 13일 08시 04분


5월도 어언 중순이다. 옷차림은 이미 햇살의 따가움을 즐길 만큼 가벼워졌다. 그렇지만 그늘진 곳에 들어서거나 아예 해가 구름에 가려지면 몸에 소름이 돋는다. 헐렁한 옷 속을 파고드는 바람 탓이다. 결혼 전에는 해마다 이맘때쯤 어머니가 내게 당부하셨다. 『옷 잘 입고 나가렴』 『이제 곧 여름이 되는데요…』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그냥 나간다. 그리고 저녁에 집에 들어서면서 『오늘 은근히 춥던데요』라고 한 마디를 붙인다. 실제로 서늘함을 느끼기도 했고 일껏 챙겨주시는 것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대답을 했던 것이 죄송해서다. 『그것 봐라, 5월 바람은 「기생 바람」이라고 하지 않던』 아 참으로 멋있는 말이다. 매섭지 않으면서도 이따금 추위를 느끼게 하는 5월 바람을 어머니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이 말이 옛날부터 있던 말인지 어머니의 창작품인지 잘 모른다. 다만 기생에 대해서 감정이 좋을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어머니 작품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아무튼 살랑살랑 품속을 파고드는 5월바람을 기생에 비유한 것은 멋스러운 풍류였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머니의 문학적 소양과 해학에 몹시 놀랐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해학은 평생 빛이 났고 가족 분위기의 기반이 되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대개 그러셨듯이 나의 어머니도 자식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셨다. 옷감을 사다 재단을 하고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재봉틀로 박음질을 하셨다. 이렇게 만들어진 누이들의 옷 중에는 「오리지널 서」라는 표시가 있는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어머니가 지은 옷의 브랜드인 셈인데 이것이 새겨진 옷은 특별한 명품임을 나타낸다. 누이들은 학교는 물론 데이트하러 갈 때도 당당하게 그 옷을 입었다. 어머니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집을 이사할 때도 잊기 어려운 명언을 만드셨다. 30년이 넘게 살던 집을 이사하려니 보통 힘들지가 않았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고 잔손질이 필요한 물건은 왜 그리 많은지. 나는 그 지겨움을 견디지 못해 조금 치우다 쉬고 하는 척 하다가 놀았다. 그러기를 몇 번, 급기야 어머니 눈에 띄었다. 『너 지금 뭐하고 있냐』 『예, 잠깐 쉬느라고요』 『그래, 그러면 쉬면서 책상이나 옮기렴』 『예?』 쉬는 중이라고 대답했기에 망정이지 일하는 중이라고 했으면 집을 통째로 옮겨야 할 뻔했다. 이제 어머니도 나이가 드셨는지 옛날 같은 명작이 나오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이 달에는 하나쯤 신작을 만드셨으면 싶다. 물론 리바이벌만으로도 부족함은 없지만…. 황인홍〈한림대교수·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