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안점이/소풍날의 「시금치 반찬」

  • 입력 1997년 5월 7일 08시 43분


고등학교 때 분홍빛 진달래가 온 산을 예쁘게 물들이고 벚꽃이 만발하면 우린 으레 읍내에서 가까운 면소재지의 벚꽃 만발한 발전소로 봄 소풍을 가곤 했다. 흰 모자에다 하얀 체육복을 입고 둘씩 짝지어 걷는 행렬은 새파란 봄풀 봄꽃과 어우러져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잠시 허리를 펴고 바라보기도 했다. 재잘대며 걸어간 발전소에 핀 벚꽃은 환호성을 자아내게 했고 장기자랑과 호랑이 선생님 골탕먹이기 작전 등으로 모두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가장 기대되고 설레는 점심시간. 그러나 어느 핸가 도시락을 펼치자마자 나는 쥐구멍으로 숨고픈 마음이었다. 시내에 사는 아이들은 김밥에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런 빨갛고 감칠맛 나는 햇김치를 담아왔고 나처럼 농촌에 사는 대다수의 아이들도 최소한 계란 부침에 멸치볶음 등 두세가지 반찬은 곁들여 싸왔다. 그런데 아무리 농촌일에 바빠도 그렇지 뒤꼍에서 뜯은 시금치만 달랑 무쳐서 소풍 반찬으로 싸주시다니…. 아침에 무친 시금치는 누렇게 변했고 국물까지 흘러 밥을 물들이며 반찬통 한쪽으로 쏠려 마치 패대기친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배고픔은 사라지고 창피하여 어머니가 밉기까지 했다. 시금치는 살짝 데쳐 참기름 듬뿍 넣고 무쳐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야 제맛인데 아침에 무친 시금치나물을 봄날 야외에서 먹자니 제맛이 날 리 없다. 둘러앉아 함께 점심을 먹는데 시금치에 친구들의 젓가락이 올리 없으니 나혼자 부지런히 먹어치울 수밖에 없었다. 시금치 나물은 소풍기분을 온통 망쳐버렸고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나물이 되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젠 투정을 받아줄 어머니가 안계시니 가슴이 저며온다. 가난한 농촌의 아낙으로 호의호식 한번 못하고 힘들게 살다가신 어머니. 이제 30대 후반의 나이가 돼 내 아이들에게 시금치 나물을 무쳐줄 때마다 어머니 모습이 서리곤 한다. 시금치 나물을 자주 무침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인가. 소풍날 달랑 시금치만 싸주시던 그 마음은 오죽하셨겠는가. 아이들 소풍날 아침 시금치를 넣어 김밥을 말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외할머니의 정마저 담아주고픈 마음이다. 안점이 (강원 속초시 영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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