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적십자 대표들의 북경접촉이 뚜렷한 성과없이 끝난 것은 유감이다. 이번 회담은 남북한 당국간 직접 대화가 중단된 상태에서 4년9개월만의 만남이자 의제도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문제여서 과거 어느 때보다 생산적일 것으로 기대했다.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과 실망은 크다.
하지만 북경 현지 보도를 종합하면 회담이 결렬됐다고 보기는 아직 이른 것 같다. 지원품 전달 절차부터 논의하자는 우리측 주장과 지원품 규모부터 먼저 밝히라는 북한측 요구가 회담의 걸림돌이 되고 있으나 양측이 협의 창구는 계속 열어 놓기로 했다는 것이다. 빠르면 이달중 다시 만날 가능성도 많은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비록 구체적 합의는 이루지 못했지만 양측대표들이 회담을 끝내며 보인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일단 고무적인 것으로 비친다.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면 북측이 무슨 조건을 내걸든 인도적 견지에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원품 전달절차를 우선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우리측 주장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원한 쌀이 군량미로 전용되거나 특정 수혜자에게만 제공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뜻이다.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최근 행정부의 대북(對北) 식량지원에 제동을 거는 법안을 마련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굶주리는 북녘동포를 돕자고 보낸 지원품이 오히려 군사력 강화에 악용된다면 그 보다 더한 역설은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 지원품 분배과정에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우리측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다.
물론 북측이 구체적인 지원규모와 품목 그리고 시기를 먼저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도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북측 입장에서는 남측이 크게 지원할 생각이 없으면서 정치적 선전효과를 노리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남북적십자 양측이 노력하기에 따라 쉽게 풀릴 문제다. 적십자 활동의 성격상 우리측이 민간단체의 지원품목과 양을 파악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만큼 북측은 공연한 의구심이나 다음 단계의 또다른 트집을 잡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
적십자는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순수한 비정부 민간기구다. 그런 정신에 투철하다면 회담장소나 지원품 수송경로 문제 등도 정치적 시각으로 논란을 벌일 이유가 없다. 북측은 무엇이 실질적이고도 효과적으로 북한 주민들을 돕는 길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